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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에게 폐를 끼치세요”
임철순 2011년 03월 21일 (월) 04:43:01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일보사와 일본의 제휴사인 요미우리(讀賣)신문은 한일 교류좌담회를 공동 개최했습니다. 1999년 가을부터 월드컵 개최 한 달 전까지 양국을 오가며 여섯 번 연 좌담회는 기획 취지대로 상호 이해와 교류 증진에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개최 장소는 쓰시마(對馬島)와 강화도, 나라(奈良)와 경주, 도쿄(東京)와 서울, 이런 식으로 짝이 되게 선정했습니다.

이 행사의 한국일보사측 책임자로서 요미우리 사람들과 협력해 일하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쓰시마에서 첫 행사가 열릴 때부터 우리는 그들의 치밀한 준비와 세심한 배려에 놀랐습니다. 좌담회 진행과 보도 방식에 관한 협의에서는 생각이 다른 게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좌담회 전후의 행사에 대한 그들의 준비는 숨이 막힐 만큼 치밀했습니다. 참석자들이 각각 출발하는 시간부터 행사 후 각자 돌아가는 2박3일 동안의 시나리오를 그들은 분 단위로 완벽하게 마련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측의 준비는 늘 성글었고, 요미우리를 본떠 시나리오랍시고 만든 것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이벤트업체에 행사 진행을 맡기겠지만, 그때는 우리나 요미우리나 기자들이 실무작업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기자들은 일본 기자들보다 통이 큰 탓인지, 그런 일을 쩨쩨하다고 여겨서 그런지 엉성하고 서툴렀습니다. 요미우리측의 의견을 듣고 아차 싶어 보완하거나 변경한 것도 꽤 있습니다.

행사 후의 회식도 우리야 양국의 좌장이 상석에 앉으면 나머지는 서열에 맞게 대충 앉으면 된다는 식이었지만, 그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음식점에 누가 먼저 도착하느냐, 그게 방석집이냐 의자에 앉는 집이냐, 좌석 배치도는 어떻게 되느냐, 시시콜콜 따지고 물어 질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행사 직전까지 확인, 또 확인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데도 막상 행사가 열리면 대충 준비했던 우리측도 별 무리없이 진행을 잘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작은 차질이나 돌발사태에 대응하는 임기응변도 그럴 듯했습니다. 행사가 끝난 뒤의 회식은 한국에서든 일본에서든 우리가 주도했습니다. 첫 행사 때부터 폭탄주를 돌리기 시작했더니 나중엔 그들도 ‘언제 폭탄주 돌리나’하고 기다리게 됐습니다.

일본어 한국어 영어가 마구 섞이는 술자리에서 “왜 그렇게 세밀하게 준비를 하고 일일이 다 챙기느냐”고 그들에게 물어본 일이 있습니다. 질문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표정과 함께 “당연한 일 아니냐”는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준비하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한국인과 일본인을 합쳐 그 중간쯤 되는 사람을 만들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인까지 세 나라 사람을 함께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세 나라 중에서는 한국사람들이 중간입니다. 10여년 전 한국일보 요미우리 중국의 런민르바오(人民日報)가 공동 개최한 동북아 3국 세미나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식사시간에 중국인들 좌석은 시끄럽기 짝이 없고 일본인들 좌석은 조용하기 짝이 없고 한국인들 좌석은 정확히 그 중간이었습니다. 한국일보사 예방 때도 일본인들은 안내해 주는 대로 정숙하게 행동했지만, 중국인들은 안내도 하지 않은 사장실 옆 방에 들어가 그림이 어떻고 의자가 어떻고 그러면서 떠들었습니다. 불쾌하다기보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쩌면 이렇게 서로 다를까 싶었습니다.

유례없는 3ㆍ11 대지진으로 일본은 지금 재탄생이냐 침몰이냐의 큰 기로에 섰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재앙의 모습은 그야말로 滿目愁慘(만목수참),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시름겹고 참혹합니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게 대응하며 남을 배려하는 ‘메이와쿠오 가케루나(迷惑を掛けるなㆍ폐를 끼치지 말라)’의 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블로거는 한 일본인이 “근처에 있는 한국에도 폐를 끼칠 것 같아 걱정스러운 나날입니다”라는 메일을 보내왔다며 놀라워했습니다. 역시 선진국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회의와 우려가 안팎에서 커지고 있습니다. 큰 재앙에도 그렇게 차분한 태도는 ‘운명이니 어쩌겠나’하는 체념과 포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황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는 역동성도 우러나기 어렵습니다. 도쿄의 한 재일동포는 아무도 지진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일본인들의 침묵이 무섭다면서도 장래를 생각할 때 실망스럽다고 말했습니다. 정치 리더십이든 일반 국민이든 젊은 세대든 최근 일본에 부족한 것은 역동성과 활기라고 생각합니다. 파격과 돌발사태에 적응하는 데 서투르면 상황 반전이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을 큰 컵에 집어 넣고 나오지 말라고 하면 남의 어깨를 밟든 엉덩이를 받쳐 주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죄다 밖으로 기어나온다고 합니다. 반면 일본인들은 접시에 둥글게 선을 긋고 선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면 그대로 있는다는 것입니다. 골프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골프가 잘 안 되면 미국인들은 책을 읽으며 연구하고 일본인들은 연습장으로 가서 맹렬히 연습을 하는데, 한국인들은 골프채를 확 바꿔 버린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지금 이렇게 채를 바꾸고 판을 바꿔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좀 소리내서 대성통곡도 하고,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이웃에 폐를 끼치고 신세를 지기 바랍니다. 흠씬 얻어맞은 사람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 거리낄 게 없고, 기꺼이 남의 신세를 진 사람은 나중에 갚기도 그만큼 잘 갚는 법입니다. 지금 일본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거리낌과 구김이 없는 기분이며 한사코 가라앉지 않고 까부라지지 않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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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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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key (64.XXX.XXX.23)
I have been so bewlirdeed in the past but now it all makes s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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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6 06:34:11
0 0
홍정욱 (211.XXX.XXX.129)
인종의 유전자 탓보다는 환경의 탓일 듯한데..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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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5 09:23:46
0 0
어느 독자 (211.XXX.XXX.129)
임선생님



그간 좋은 에세이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닙니다.

일본에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 교육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느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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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2 13: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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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60)
우리의 부끄러운 민족성을 너나없이 얘기는 하지만 우리는 참 우리가 생각해도 '않되는 일 없고 되는일 없는' 이상한 민족이며 그런대로 자랑스런 민족임이 틀림없습니다. 인터넷에서 우리의 금모으기 처럼 그들도 함께 힘을 모아 재도약의 기회를 잡아야한다는 글을 읽으며 세계가 우리를 향해 보내는 박수가 바로 그런 민족성이 아닐까 다시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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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1 23:20:40
0 0
신현덕 (211.XXX.XXX.129)
잘 읽었습니다.이번 지진으로 우리의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봉사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많은 변화였지요.놀라운 것은 어디엔가 수십명이 숨진 현장이 있을텐데 일본 언론이 전혀 보도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만 하나요.화제가 되지 않아서인가요?아픔을 승화하는 그들의 모습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기회가 되면 일본에 가서 그들의 참 국민성과 접해보고 싶습니다.신현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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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1 17: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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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현 (211.XXX.XXX.129)
시원히 잘 읽었습니다.

담고 있었던 하고 싶은 말씀을 글로 잘 표현해 주어 잘 읽었습니다.

일본국 일본인 그리고 그 안에 어우러져 살고 있는 세계인 모두가 건강하게 잘 있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조 철 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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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1 13:5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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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태식 (211.XXX.XXX.129)
늘 새로운 통찰의 기회를 부여해주는 주필님의 글,오늘도 하나의 깨달음에 이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간 수담을 나누는 자리(소주 내기)도 마련했으면 좋겠군요. 주필님의 건강과 건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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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1 13:4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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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백 (211.XXX.XXX.100)
어떤이들은 사무라이시대의 영향이 아직 남아서 그런게 아니냐고 말합니다. 저도, 전에 읽은 대망을 떠올리며, 그럴법 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세상이 변했으니 사람들도 변했겠지요. 일본의 언론이 분위기를 애써 차분하게 주도한 듯 보입니다. 아비규환에서 비명이 없었다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죠. 주필님, 댓글 핑계로 안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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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1 10: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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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211.XXX.XXX.129)
우리가 文의 사회라면 일본은 사무라이, 武의 사회여서 죽음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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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1 13:5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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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길순 (211.XXX.XXX.129)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더니 이제는 측은지심마저 들더군요. 오늘은 꼭 일본인 친구에게 진지한 메일을 써야겠군요. 그 침착하고 고요한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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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1 10: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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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진 (211.XXX.XXX.129)
메일 잘읽고있읍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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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1 10:01:14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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