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 최경주 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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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최경주 덕에

방석순

2011년 05월 23일 (월) 00:26:10

지난 한 주일은 ‘국산 탱크’ 최경주 덕에 즐거웠습니다. 오나가나 화제가 그의 짜릿한 역전 승리였습니다. 최고의 상금이 걸린 PGA(미국프로골프협회) 투어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 아시아권 선수가 우승한 것도 처음이라고 합니다.

총 상금 950만 달러 가운데 우승 상금은 171만 달러, 우리 돈으로 자그마치 19억 원입니다. 물론 세금 내고 캐디 몫을 떼고 이것저것 빼고 나면 주머니에 들어오는 순수입은 훨씬 줄어들겠지만 나흘 동안에 그렇게 큰돈을 번다니 놀랍고도 즐거운 일입니다. 최경주는 이번 우승으로 올 시즌 상금 랭킹은 3위(291만 5천 달러), 세계 랭킹은 15위로 껑충 뛰었습니다.

최경주와 데이비드 톰스(미국)의 막판 대결은 그야말로 극적이었습니다. 4라운드 16번홀에서 최경주는 앞서가던 톰스를 따라잡아 동타를 이루었습니다. 파 3의 17번홀, 섬(아일랜드)을 이룬 그린 위로 날린 샷이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3m 버디 퍼트를 성공시켜 처음 리드를 빼앗은 것입니다. 18번홀에서는 톰스가 버디를 잡아 4라운드 종합 13언더 275타로 또 다시 타이. 그러나 17번홀에서 벌어진 연장전에서 훨씬 유리한 지점에 공을 붙여 놓고도 3퍼트로 무너지는 톰스를 지켜보며 최경주는 침착하게 파 퍼트에 성공, 감격적인 우승을 잡았습니다.

더욱 기분 좋았던 것은 동서와 노소의 구분 없이 팔을 뻗어 최경주와 손을 마주치며 새 챔피언의 탄생을 축하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최경주도 멀리서 비행기까지 타고 와 응원해준 미국 팬들에 감격했다고 말했습니다.

예전 어느 골프 해설자가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외화벌이 가운데 골프만한 게 없다고. 사나흘 만에 혼자서 일확천금을 이루니 그럴듯한 말입니다. 게다가 개인적인 명예도 얻고 나라 이름까지 빛냅니다. 그러나 그게 어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겠습니까. 전남 완도에서 자라 고등학교 때 처음 골프채를 잡아보았다는 최경주. 낯설고 말도 통하지 않는 미국 땅에 건너가 오늘의 영광을 만들기까지 그의 고독하고 고단했던 골프 인생은 장편 소설 한 권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골프가 귀족 스포츠로 통합니다. 주머니 사정 때문에 웬 만큼 큰 맘 먹지 않으면 제 돈 내고 골프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내 골프 인구를 300만 명 내외로 본다지만 글쎄요, 그 가운데 제 돈 들여 정규적으로 골프를 즐길 수 있는 숫자가 얼마나 될까요. 사정이 그러니 그 좋은 스포츠가 뒷거래를 조장하는 ‘접대 골프’, ‘빈대 골프’로 변질되고, ‘내기 골프’, ‘사기 골프’가 극성을 부리게 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골프의 ‘골’자도 잘 모르던 시절 골프의 고향이라는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를 찾아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스포츠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창간특집을 위해서였습니다. 최초의 골프장이라고 알려진 '디 올드 코스(The Old Course)'는 황량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페어웨이와 러프조차 구분키 어려운 펑퍼짐한 모래땅 위 풀밭, 실개천(burn)과 오래된 돌다리, 경계를 알 수 없는 회색빛 하늘과 바다, 그리고 거친 바람이 있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그걸 ‘링크스(links)'라고 불렀습니다. 세계의 골프 경기규칙을 관장하는 250년 전통의 R&A(Royal and Ancient) 골프 클럽이 거기 있다는 게 신기해 보였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나라 골프장은 꽃밭입니다.

우리나라 골프장은 꽃 심고 분수 만들고 돈을 바르는 치장이 자랑이지만 그곳 골프장은 자연이 빚어내는 변화와 거기에 도전하는 숱한 골프 영웅들의 이야기가 자랑거리입니다. 여기서는 값비싼 골프 장비를 자랑하는 설익은 아마추어나 입에서 단내를 풍기는 내기 골퍼들이 필드를 누비지만 거기서는 짝도 맞지 않는 골프채를 들고 나와 함께 즐기는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가 링크스를 수놓습니다.

세인트앤드루스 사람들은 생활의 중심무대가 링크스라고 말합니다.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링크스에서 찾는다는 겁니다. 허풍일지도 모르지만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기 전에 멀리서 휘두르는 클럽의 스윙 폼만으로 사람을 식별해낸답니다. 골프 스윙이 바로 그곳 사람들의 지문인 셈이지요. 어떤 두 사람도 똑 같은 스윙을 할 수 없다고 그들은 장담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최경주, 박세리와 같이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스타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골프가 언제쯤 한 가족이 부담 없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스포츠가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래전부터 부르짖어온 골프 대중화의 길은 아득히 멀게만 느껴집니다.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도 골프장을 운영하는 사람도 골프가 대중적인 스포츠가 되는 걸 원하지 않는 눈치들입니다.

물론 골프가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는 스포츠는 아닙니다. 저와는 특히 좋은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야, 공이 얄미운 선배 머리통이라고 생각하고 때려 봐. 스트레스 확 풀리지.” 어느 선배의 꾐에 넘어가 뒤늦게 배운 골프가 제 인생을 얼마나 더 고달프게 했던지. 동료들 쫑코 받고 캐디 눈총 받고. 캐디 아가씨는 갈 지(之)자로 넘나드는 공을 용케도 다 챙겨 타수를 매기더군요. 얄밉게 한 타도 빠뜨리지 않고. 그러니 산으로 들로 헤매고 다닌 제 공의 신세는 더욱 고달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왜 물만 보면 다이빙을 하려드는 것인지.

출장 갔던 미국에서의 어느 휴일 동료들에게 이끌려 가까운 퍼블릭 코스에 나갔습니다. 좌우로는 울창한 숲, 앞으로는 널찍한 호수에 오리 떼가 한가로이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떨칠 수 없는 불길한 예감, 호수 깊숙이 머리를 디밀고 있는 그린이 아무래도 찜찜했습니다. 잠시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날린 대망(待望)의 샷. 갑자기 꽥 꽤개객 하는 오리 떼의 비명이 호수 위로 퍼져나갔습니다. 아, 자유로운 영혼, 제 공은 또 어김없이 물을 향해 날아가 오리 떼에 명중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따가운 시선, 이후의 골프는 보나마나였습니다.

골프 안 하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있지요. “아니, 날아오는 공도 때려내는데 그까짓 풀밭에 얌전히 누운 공도 제대로 못 쳐?” 그럼 골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응수한다지요. “아, 살아있는 공도 주체 못하는 판에 죽어 있는 공 살려내는 게 어디 쉬워?” 그래서 그런지 죽기 살기로 훈련을 거듭하는 프로 골퍼들 역시 어느 날 가볍게 버디를 낚던 홀에서 또 어떤 날엔 온탕 냉탕 넘나들며 보기, 더블 보기로 죽을 쑤기도 합니다.

그러나 채를 내던지고 이번처럼 ‘탱크’의 멋진 질주를 즐기는 것 역시 골프라는 스포츠의 매력일 것입니다. 이미 골프를 접은 많은 사람들이 저처럼 지난 한 주일 동안 모임에서마다 최경주를 떠올리고 어쭙잖았던 제 골프 내력을 떠들어대며 즐거워했을 겁니다.

올드 코스의 역사를 소개하는 책에 이런 글귀가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 동해안 모래바람이 심술을 부리는 이 황량한 바닷가 언덕이 바로 세계 사람들을 들뜨게 하고, 때론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며, 한 번 빠지면 헤어날 길이 없도록 만드는 매혹의 스포츠, 골프의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다.’

최경주가 이번에 우승한 플로리다주 소그래스TPC 스타디움 코스는 지난 2000년 그가 처음 미국에 건너가 정말 많은 땀을 흘렸던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본인도 11년 전 땀의 결실이 맺어졌다며 기뻐했습니다. 결국 승리의 비결은 남보다 더 많은 땀인가 봅니다.

두 차례나 험난한 자격시험(퀄리파잉 스쿨)을 치르며 PGA에서 활동한 지 12년째, 최경주는 그 동안 8차례 우승을 기록했습니다. 한국 선수 최초의 PGA 입성, 최초의 우승도 모두 그의 기록입니다. 어느덧 만 41세. 탱크 같은 체력으로 보아서는 앞으로도 몇 년쯤 힘찬 도전이 이어질 거라 기대됩니다. 기왕이면 한 번도 밟아 보지 못한 메이저 대회(마스터스, US오픈, PGA 챔피언십, 브리티시오픈) 정상에 오른다면 얼마나 통쾌하겠습니까.

최경주에 이어 양용은(39), 위창수(39), 나상욱(28), 앤서니 김(25)의 선전도 보고 싶습니다. LPGA를 주름잡던 우리 낭자들의 소식도 궁금합니다. 한때 다승 선두, 상금 선두를 달리던 신지애(23), 최나연(24), 위풍당당한 스윙으로 늘 팬들의 기대를 부풀려온 위성미(미셸 위, 22)의 승전보가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