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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을 찾아서
임철순 2011년 05월 31일 (화) 02:37:45
2008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71)는 한국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 문학을 칭찬하며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대산문화재단(이사장 신창재)이 주관한 서울국제문학포럼(5월 24~26일)에 참석하기 위해 2년 만에 방한했는데, 한강 김애란 등 젊은 작가들을 거론하며 “한국문학은 젊다”고 말했습니다. 2007∼2008년 이화여대 통ㆍ번역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는 지금도 이화여대 석좌교수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한국문학과 한국어를 배우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번에 와서 한 말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국어 어휘의 풍성함을 드러내는 사례로 ‘보람’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것입니다. 프랑스어나 영어에는 이런 단어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문 인터뷰에 이어 마지막 날 고별만찬 인사에서도 그는 같은 말을 했습니다. 5년 만에 다시 열린 서울국제문학포럼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보람’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람이란 자부심이며 미래에 대한 감정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각 문화는 동등하게 만나야 한다는 것, 문학이란 집을 짓는 행위와 같다는 것, 그것은 형극의 길이라 할 수 있지만 보람있는 일이라는 것, 그는 이런 말을 하고 갔습니다.

내가 아는 보람이라는 말의 용례는 겨우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에 나오는 것입니다. ‘(전략)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후략).’ 문학작품에서는 그렇다 치고, 일상의 대화에서는 주로 비아냥거리는 데 이 말을 씁니다. 하늘은 잔뜩 흐린데 비가 오지 않으면 “우산 갖고 온 보람이 없어 어쩌나?”하고, 점심시간에 우산 들고 나온 사람을 놀립니다. 골프를 칠 때 누가 벙커에 공을 빠뜨릴 경우 겉으로는 걱정해 주는 척하며 속으로 고소해하다가 그 사람이 멋진 샷으로 그린에 공을 올리면 “이런 씨, 벙커에 빠진 보람도 없이.”라고 투덜거리곤 합니다.

그렇게 심술이 많은 터에 르 클레지오의 말을 듣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지면서 새로운 말을 발견한 것처럼 보람이라는 말이 갑자기 중요해 보이고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전에서 일부러 찾아보니 ‘보람’에는 내가 아는 것 말고 다른 뜻이 더 있었습니다. ①)약간 드러나 보이는 표적 ②다른 물건과 구별하거나 잊지 않기 위해 표를 해 둠. 또는 그런 표적. 예:비행기에 탈 때에는 가방마다 눈에 띄는 보람을 해 두어야 한다. ③어떤 일을 한 뒤에 얻어지는 좋은 결과나 만족감. 또는 자랑스러움이나 자부심을 갖게 해 주는 일의 가치.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③의 풀이 한 가지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뜻도 있었나 하고 놀라면서 내 삶의 보람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도 잇달아 했습니다.

인간의 삶에는 무수한 방법과 길이 있지만, 생애의 중반을 이미 넘긴 게 틀림없는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보람을 느끼고 거둘 수 있는 일이란 어떤 형식이든 글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글을 쓸 거라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나와 남의 삶을 잘 알아야 하고 말을 정확하게 많이 알아야 하고 모국어를 깊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한 달 전에 <박완서 문학의 뿌리를 말하다>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타계 14개월 전인 2009년 11월 12일 서울대가 개최한 관악초청강연의 강연과 문답을 수록한 책입니다. 이 강연에서 박완서(1931~2011) 씨는 책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사전을 찾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글에 쓰려고 하는 말이 사전에 있는 말인지, 자신이 생각하는 뜻과 같은지 늘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는 ‘모국어야 너는 얼마나 작으냐? 작지만 얼마나 예쁘고 오묘한지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작아지는 건 차마 못 보겠다.…나는 모국어 안에서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라는 박씨의 글도 소개돼 있습니다. 모국어가 작다는 말은 원래 김수영(1921~1968)의 시에 나오지만, 박씨의 산문으로 들으니 더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그 작은 모국어 중에서도 더 작은 모국어로 강릉 사투리를 들 수 있습니다. 강릉사투리보존회(회장 조남환)가 최근 개최한 세미나에서 이곳이 고향인 이익섭 서울대 명예교수는 “강릉 말은 길이(음장)나 높낮이(성조)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게 많고 활자로 인쇄할 때 찍을 수도 없는 아주 귀한 언어요소로 가득하다”고 말했습니다. 훈민정음에 나오는 고어의 흔적이 강릉 말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억양이 강하고 퉁명스럽지만 정겹고 보석처럼 귀한 강릉 사투리는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모국어를 지키고 모국어 중의 모국어를 살리고 기르는 데 본능적인 애정을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귀한 모국어로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과 우리의 귀한 모국어를 새로 발견하게 해 주는 사람들에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그들의 노력을 값지게 받아들이고 함께 말을 가꾸도록 하는 것이 국민이나 독자로서의 소중한 보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에 인용한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강릉 사투리로 번안한 시가 있습니다. 좀 억지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사투리의 맛과 멋을 알아보기 위해 그대로 여기에 옮깁니다. 재미있는 작품이 새로 하나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목단이 벙글기까정은/내는 상구 내 봄으 지달리구 있을 기래요/목단이 뚝뚝 뜰어져베린 날/내는 그적새서야 봄으 야운 스룸에 택자바리 괼 기래요/오월 워느날 그 할루 되지게 덥든 날/뜰어져 든논 꽃잎파구마주 휘줄구레해버리구는/오랍덜에 목단은 꽁 고 먹은 자리매루 웂어지구/뻗체오르던 내 보람 서운하게 와르르했느니/목단이 지구 말문 그뿐 내 한 해는 마커 내빼구 말아/삼백 예순날 줄고지 우전해 찔찔 짜잖소/목단이 벙글기까정은/내는 상구 지달리구 있을 기래요, 매른웂는 슬픔으 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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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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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임 (211.XXX.XXX.129)
자유칼럼구독하는 보람이 있네요^^윤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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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8 08:52:58
0 0
다비 (174.XXX.XXX.138)
마지막 구절들, 시를 사투리로 쓰신 것을 읽으며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웃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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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6 11:5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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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현 (211.XXX.XXX.129)
참 좋은 내용
잘 전달 되어 감사합니다.
송 봉 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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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1 17: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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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215)
이렇게 저렇게 모인 문화상품권으로 노래도 늙는구나 한 권 사고 남은 것으로 우리말 대백과 사전 한 권 사야지 맘먹습니다. 지방 사투리가 어느 것 하나 정겹지않은 게 없지만 그 중에서도 강원도 사투리는 들을수록 재미있고 정겨운데 이순원씨의 단편소설들에서 감칠맛나게 쓰여졌지요. 무엇보다 단어 자체 보다는 그 달뜬 억양에서 강원도 사투리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글로 표현할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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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1 00: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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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211.XXX.XXX.129)
맞습니다. 저는 처음에 시끄럽다고 싫어했는데 그뒤 점차 좋아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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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1 17: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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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길순 (211.XXX.XXX.129)
자알 읽었습니다. 보람찬 하루가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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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31 13:5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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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양 (211.XXX.XXX.129)
<노래도 늙는구나> 잘 읽고 있어요. 책을 내신 것이 큰 보람이실텐데요....다시 한번 축하드리구 언제나 재밌고 유익한 글 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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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31 11:2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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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169)
병약한 친구의 병문안을 가는데 "오이 소백이"김치를 조금 담가서 들고 갔더니 어찌 좋아하던지 ...
30년간 파킨스병을 앓아 서서이 육체가 무너져 가는 친구...
돌아오면서 둘의 공통시절인 여고시절을 되돌리며 안타까움이 앞선다.
"그래,마음이 시키는 일은 그때그때 행동으로!" 내 얇은 주머니 사정이 방해가 되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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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31 10: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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