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호국보훈의 달, 오늘은 현충일. 어찌 어찌 잊으리오. 민족사 최대의 비극인 6. 25전란에서 가깝게는 천안함 폭침, 연평도 도발 사태에 이르기까지 조국의 산하를 지키다 산화한 젊은 영웅들의 숭고한 뜻을. 호국영령들의 희생을 기리며 삼가 제단에 한 송이 꽃을 바칩니다.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중 감동적인 걸작이 많습니다. 우리 영화로는 '피아골'. '돌아오지 않는 해병', '빨간 마후라' 등이 떠오릅니다. 헐리우드로 눈을 돌려보면 '젊은 사자들', '새벽의 7인'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서부전선 이상 없다', '지상최대의 작전'. '멀고 먼 다리', '나바론', '패튼 대전차군단', '플래툰', '지옥의 묵시록'…. 열거하기가 숨이 가쁩니다. 비교적 최근 영화로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씬 레드 라인'이 생각나는군요. 필자는 그 중 '발지대전투(Battle of the Bulge‧1965, 감독 켄 아나킨)'를 최고의 전쟁영화로 꼽습니다.

2차 대전의 승패를 가름하는 분수령이 된 독일군의 '발지대공세'를 묘사한 영화인데, 로버트 쇼, 헨리 폰다, 로버트 라이언, 테리 사바라스, 찰스 브론슨 등 배역진이 화려합니다. 쟁쟁한 스타들이 무더기로 출연하면 구심점을 잃고 각개약진을 하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등장인물들의 개성적인 연기가 조화를 이룹니다. 또한 전쟁영화의 미덕인 볼거리와 구색을 갖추어 지루할 겨를이 없습니다. 아날로그 방식의 호쾌한 전차전, 지휘부 간의 갈등, 병사들의 긴박한 심리, 투철한 군인정신, 극적인 반전이 어우러집니다.

종래의 전쟁 영화는 주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선이고 독일과 추축국은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로 그려졌습니다. 서부영화에처럼 미국지상(우월)주의의 구태의연함이 언뜻언뜻(또는 적나라하게) 드러나 불편한 느낌이 있었죠. 반면 이 영화는 객관적 관점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독일군 입장에 섬으로써 색다른 느낌을 주었습니다. 독일군이 막바지 대공세인 벨기에 북방 아르덴 삼림지대에서의 '발지 전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국애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무장한 독일 기갑부대 장교의 삶과 행적, 장렬한 최후가 기둥 줄거리입니다.

특히 영화의 중심 서사를 이끌어가는 독일 장교 헤슬러 대령 역의 로버트 쇼('007 위기일발', '조스' 출연)의 연기가 압도적입니다. 전차전의 귀재인 헤슬러 대령의 기갑부대는 승승장구하다 다음 전투에 대비한 연료보급을 위해 유류창으로 향하던 중 미군의 속임수(도로 표지판을 바꿈)와 매복에 걸려 전멸합니다. 헤슬러 대령이 지휘 탱크에 갇혀 넘실거리는 불꽃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휘둘러 신입 전차병 시절의 군가(Panzerlied)를 부르며 죽어가는 장면은 전율이 느껴집니다. "눈보라가 쳐도 해가 내려 쪼여도 밤이나 낮이나 우리는 폭풍 속으로 돌진한다…."

어찌할 수 없는 폐쇄된 공간에서 탈출할 생각을 버린 채 불길에 타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이고 장엄한 장면은 이후 다른 영화에서 빈번히 패러디됩니다. 이를테면 연전에 상영된 영화 '스타트랙-더 비기닝'에서 비근한 예를 찾아볼 수 있군요. 지구방위대와 맞서던 로물란 행성의 드릴쉽 함장인 네로도 자신의 함선에서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요.

라펠이 넓은 트렌치코트가 어울리는 헤슬러 대령 역 로버트 쇼는 일생일대의 연기를 펼칩니다. '진짜사나이'의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실증한 캐릭터였어요.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장르 영화이자 캐릭터 영화라고도 할 수 있지요. 전쟁의 발발, 진행 경위와 합목적성은 따로 판단하더라도 전쟁 자체를 삶의 의지로 받아들인 한 개인이 전쟁의 와중에서 불꽃같은 삶을 살다 스러져 갔을 때 그를 지탱해준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과 헌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성찰의 계기를 준 무거운 주제의 영화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