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二分法)으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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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二分法)으로 본 세상

황경춘

2011년 06월 20일 (월) 00:03:17

감수성이 강한 소년기에 탐독(耽讀)한 간추린 외국 소설 번역물의 영향으로 선악(善惡)의 단순한 이분법(二分法)이 저의 어릴 적 판단을 지배했습니다. ‘레 미제라블’의 착한 장 발장과 그를 괴롭히는 자베르 경감, 또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에드몽 단테스와 그를 둘러싼 악인들, 이런 구도로 사물을 판별할 때가 많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얼마 전까지는 일본 ‘황도주의’(皇道主義) 사상의 철저한 세뇌교육으로 일본은 선(善)이고 일본을 반대하는 나라는 악(惡)으로 일방적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일본의 대륙침공으로 중화민국정부와 층돌하자 중국의 동맹국인 미국과 영국은 적이 되고 나치즘의 독일과 파시즘의 이탈리아가 일본의 우방이 되는 단순한 도식(圖式)이었습니다.

이 선악의 큰 틀 바탕에서 파생된 것으로 약한 자, 불리한 쪽 또는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되는 편을 드는 습성이 생겼으며, 그 후 복잡한 사상의 변천 과정을 겪으면서도 이것이 저의 인생관의 근본을 형성하였습니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으로 짧은 일본 군대생활을 끝내고 고향인 남해로 돌아온 저는, 광복 후 한 달도 채 안된 사이에 일어난 변화에 제 눈을 의심하였습니다. 인구 5천 명쯤의 작은 마을이 벌써 좌우로 갈라져 정치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사히 귀국한 저를 집으로 찾아 온 한 후배가 조잡하게 인쇄된 두세 권의 책자를 건네 주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일본에서 사회주의 입문서로 유명한 ‘빈보 모노가타리’(貧乏物語)였습니다. 교토(京都)대학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박사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에 써 당시는 물론 전후에도 일본의 베스트셀러가 된 책입니다. 제가 받은 것은 요약된 소책자였지만, 이런 것을 광복 한 달도 안 돼 만들어 낸 당시 좌익 운동가의 발 빠른 움직임은 저를 다시 놀라게 했습니다.

시골의 소지주였던 아버지의 엄중한 경고로 저는 그 친구가 일하는 청년단체에 가입을 안 하고 있다가 결국 미군정 파견대에서 일하게 되어 정치운동과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 뒤로도 무산계급을 위한다는 사회주의에 심정적으로 동조는 하면서도 파업과 폭력을 일삼는 사회주의 운동에는 끝내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광복의 격동기를 겪으며 저의 사고체계(思考體系)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만, 선악 또는 빈부의 단순 비교에 의한 제 나름대로의 이분법은 계속 살아 있었습니다. 광복 이후 역대 선거에서 집권당 후보에 표를 던진 것은 김영삼 대통령후보가 처음이었습니다. 미국의 민주당, 영국의 노동당, 일본의 사회당이 제 마음속의 지지정당이었고, 일본의 사회당이 두 쪽으로 갈라졌을 때엔 좌파 사회당을 동정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회당이 조총련 및 북한과 손잡아 재일교포 북송 운동을 시작하자 그들에 대한 저의 환상은 끝났으며, 과거 사회당원이거나 그에 동조하다가 현재 집권당인 일본민주당에서 간부로 있는 인사들이 아직도 파벌 싸움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공산당을 비롯한 모든 좌익 집단의 집안싸움은 좌익 이데올로기의 숙명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미국의 두 노동단체 ‘AFL’(미국노동연합)과 산별노조 ‘CIO’가 통합하기 전에는 CIO 편을 들고 국제적으로는 ‘WFTU’(세계노동조합연합)을 지지하다가 온건파인 ‘ICFTU’(국제자유노조연합)쪽을 이해하게 된 것도 저의 이분법에 따른 것입니다.

80여 년의 전통을 가진 연고전의 경우 별 연고도 없는 고려대를 응원하고, 도쿄의 와세다(早稻田)대학과 게이오(慶應)대학의 소케이센(早慶戰)에서는 와세다를 응원하게 된 것은 고려와 와세다 두 대학 교풍이 상대 학교보다 호방(豪放)하고 자유분방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이분법은 국내 여러 분야에서 라이벌로 활약하는 인사에도 적용되었습니다. 바둑계의 조남철 명인 대 김봉선 8단, 연극계의 동갑 인기인 김동원과 이해랑, 가요계의 남진과 나훈아 등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는 대결이 많았습니다. 그 중 인상에 남는 라이벌전 하나가 당시 한국 영화계에서 불꽃 튀는 선두다툼을 벌이고 있던 홍성기 신상옥 두 감독의 경쟁이었습니다.

그들의 숙명적 대결이 1961년 1월 거의 동시에 개봉된 두 감독의 영화 흥행성적으로 결판났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감독은 춘향전이란 같은 주제의 영화를 동시에 제작하여 영화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으나 신 감독이 서울 개봉관 입장객 38만이란 당시로서는 공전의 대기록을 세워 선배로서의 면목을 세웠습니다.

제 이분법은 신 감독을 선택했습니다. 많은 영화 팬들도 그의 작품에 개봉 전부터 기대를 걸었는데 거기에는 몇 가지 사연이 있었습니다. 신 감독의 ‘성춘향’ 제작 신고가 1960년 7월에 문교부에 접수된 바로 한 달 뒤에 홍 감독의 ‘춘향전’ 제작 신고가 접수되었다는 사실이 상식 밖의 일이라고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성춘향’에는 당시 최고 인기 배우인 최은희 김진규 도금봉 허장강 등 이름만 들어도 영화 속의 배역을 짐작할 수 있는 호화 진용이 포진했습니다. 반면 홍 감독의 춘향은 김지미가 맡았습니다. 뛰어난 미모의 그녀는 자기를 스타로 만든 홍 감독과 16세란 나이 차이를 무릅쓰고 결혼하여 그의 팬들을 실망시킨 데다가, 통념적 이미지의 춘향 역으로는 최은희의 한국여성 전통미를 당할 수가 없다는 여론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알기 쉬운 자기류의 이분법으로 살아 온 80 인생이었는데, 요즘에는 이 간편한 양자택일 잣대로도 한 쪽 손을 선뜻 들어주고 싶은 편이 보이지 않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에서 혼잡하고 어지러운 이전투구(泥田鬪狗)만이 이 늙은 눈을 현혹시킬 뿐입니다.

홍정욱 (110.XXX.XXX.192)

매우 잘 읽었습니다. 저는 아직 50대로서 황선생님의 경륜에는 무색할 따름이지만 저의 요새 심경도 같습니다.
오로지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만이 최고의 선 인듯 합니다
만약 누가 개인의 이익을 철저히 외면한 채 타인을 위한 생각만을 하며 평생을 살아간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른지요.
그 사람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할지, 아니면 세상을 살아가는 최고의 방식이 되어 빛나는 존재가 될지.. 궁금합니다.
삼복에 부디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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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2 06:3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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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세현 (110.XXX.XXX.223)

선생님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글에 쓰신 대로의 이분법이라는 글자에도 불구하고 고뇌의 역력한 흔적이 느껴집니다.
결국에는 선택을 해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만,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자체가 견디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또 다시 목마르게 기다립니다.
더운 여름 건강에 한층 조심하실 때인 줄 아옵니다.
건필 앙원하옵니다.

독자 방세현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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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1 07: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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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장춘 (110.XXX.XXX.223)

황선생님의 글을 쭉 읽고 있습니다. 저희 세대( 40년대 출생 )보다 앞서서 사셨던 황선생님 세대의 생각과 그 형성 배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1970년대 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한
언론계의 후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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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1 07: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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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211.XXX.XXX.129)

요즘에는 이 간편한 양자택일 잣대로도 한 쪽 손을 선뜻 들어주고 싶은 편이 보이지 않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에서 혼잡하고 어지러운 이전투구(泥田鬪狗)만이 이 늙은 눈을 현혹시킬 뿐입니다.
---------->이 대목이 황경춘 선생님의 절창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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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15:4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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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203)

다소 혈기(의분심)가 있는 연령일때는 "회색 분자"라는 용어가 기회주의자라고 받아 들여 졌는데 ,지금은"관용,너그러운자"의 의미로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함니다.
6.25의 반발요인이 지나친 흑백논리로 시작됨을 알고서는 이분법의 사고를 강요한 교육에 젖어 왔음을 확인하고 놀람니다.
백색에도 미량의 흑색이,흑색에도 미량의 백색이 들어가야 더욱 선명한 흑색,백색이 된다는 미술부분의 내용을 읽은 적이 있는데 자연스레 받아 들여졌지요.
사람은 그렇게도 선하지도,그렇게도 악하지 않다고 보면 좋겠는데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현실(휴전)이 흑백논리쪽으로 우리의 잠재의식을 몰고감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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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09:4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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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저 (110.XXX.XXX.223)

틀람없이 저보다 젊은 새대라 생각되는 최 여사가 이문제에 저보다 훨씬 더 깊은 생각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서뿔리 이글을 쓴 저가 부꾸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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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13:3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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