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형이 떠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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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형이 떠난 자리

황경춘

2011년 08월 26일 (금) 00:37:41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던 무더운 8월의 어느 날 종형(從兄)의 부음을 받았습니다. 아흔의 고령에 얼마 동안 병석에 계셨으니 전연 예기치 않은 소식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그 순간의 놀란 가슴이 시간이 흐를수록 깊은 슬픔과 충격으로 변해갔습니다. 그것은 50여 년 전 젊을 때 부모님과의 사별에서 느낀 비탄(悲嘆)과는 또 다른 감정이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엔 집안에 어른이 아직 많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 젊은 패기로 당시의 아픔을 곧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슬픔과 충격의 후유증이 얼마 전 저를 잠깐 괴롭힌 적이 있는 염세관까지도 들먹이는 상황입니다.

종형이 계심으로써 제가 이때껏 느꼈던 마음의 편안함 또는 의존심이 일시에 무너지는 허탈한 감정이 종형을 선영에 모신 지 보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종문(宗門)의 어른으로 또 지역사회의 일꾼으로 그가 남긴 큰 발자취를 생각할수록 그가 없는 상실감이 제 가슴을 억누릅니다.

어느 분의 글에서 읽은 생각이 납니다만, 그것은 종형과 제가 공유하는 인생의 소중한 경험과 추억이 단절되는 허탈감이었습니다. 종가의 둘째로 태어났지만 형제 셋을 앞세우고 스스로 종가를 지켜가야 했던 종형은 인생의 숱한 고비를 슬기롭게 넘겨 문중에서는 물론이고 지역사회에서 높은 존경을 받으며 일생을 마쳤습니다.

종형이 떠난 후의 빈자리는 날이 갈수록 저에게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그가 가심으로 집안의 여러 문화적 전통이 실질적으로 단절되는 일종의 세대교체를 실감하게 된 것입니다. 유교문화에서 유래된 조상님들이 물려주신 여러 가정행사를 꼭 그대로 지켜야 할 시대적 필요성을 통감하지는 않습니다.

한자세대(漢字世代)에 속하는 저는 ‘유세차(維歲次)...’로 시작되는 한자로 된 축문을 부모님의 기제사 때에 사용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다음 세대에 강요할 생각은 전연 없습니다. 종형은 이 점에 있어 매우 엄격했습니다. 집안의 시사(時祀) 때면 한자로 된 축문은 물론이고 제사 순서나 헌관(獻官)의 선정 등을 꼼꼼하게 미리 준비하여 각 집에 통고를 하고 제물에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시제 때마다 조상님 중 한 분을 차례로 선정하여 그분의 공적을 가족들에게 설명하고 특별히 잔을 올리는 행사를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계속하였습니다.

오래 전에는 자기 소유의 산림지에 풍수의 지도를 받으며 가족묘지를 새로 만들어, 그때까지 먼 곳에 모셔져 있던 대부분의 분묘를 한 곳으로 모으는 대역사를 마쳐, 성묘 시에 경험하던 많은 불편을 덜게 하고 본인의 유택(幽宅)도 그 자리에 마련했습니다.

슬하에 5남매를 두고서도 일찍 돌아가신 장형의 3남매를 같이 키우고 교육까지 시켜, 문중에서는 물론이고 지역사회에서 칭송을 많이 받았습니다. 장조카가 장성하여 사회에 나온 뒤에도 문중 행사는 도맡아 하시고 전국적인 문중 행사에도 여러 번 참석하는 등 조상에 대한 효성이 남달랐습니다.

이제 그 자리가 비었으니 뒤에 남은 집안 식구들의 허탈감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젊은 장조카가 뒤를 이어가겠지만 종형이 주관하던 식의 가족전통문화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해 갈 것이 불을 보듯 해, 벌써부터 고인에게 죄송스럽습니다.

고인은 1960년 3월부터 1993년 말까지 34년 동안 고성문화원장으로 있으며, 소가야(小伽倻)왕국의 유적지인 고장의 전통문화 발굴과 개발에 힘쓰고, 퇴임 전에 1,188 ㎡(360 평)의 대지를 기증하여 그 자리에 3층짜리 문화원 건물을 짓게 하였습니다. 고인의 장례식 날 문화원에서는 노제를 겸해 그 건물 마당에서 영결식을 거행해 고인의 은덕을 기렸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밑에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김학렬 씨와는 초등학교 시절 친구였던 인연으로 그를 통해 지역사회 개발에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한때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도 일하였습니다.

일제 말년 제가 잠깐 일본 도쿄(東京)에서 공부할 때, 종형은 신문배달을 하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식량사정이 나빴던 때라, 가끔 만나면 우리 두 사람은 으레 거리의 포장마차에서 싸구려 꼬치나 튀김 음식으로 시장기를 덜고 불편한 객지생활의 서러움을 달랬습니다. 그 뒤 종형은 장형이 계신 후쿠오카(福岡)의 어느 탄광 마을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다 종전을 맞아 숱한 고생 끝에 광복을 찾은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을 도와 가업인 상업에 종사하였습니다.

문화원장 직을 그만두신 후에도 지역사회 발전에 많은 관심을 가져오던 종형은 2년 전에 희귀병인 근육이완증으로 수년 투병 끝에 형수가 돌아가신 뒤 점차 삶의 의욕을 잃으신 듯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계시다가 결국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 전체가 큰 변환기를 맞고 있습니다. 전통적 가족제도가 허물어지고 가정의례도 크게 바뀌고 있습니다. 우리 가문에서도 종형의 별세가 필연적으로 그런 변화의 상징적 전환점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권승렬 (110.XXX.XXX.72)

선생님

글을 읽고 가슴이 찡했습니다.
저도 종가의 셋째입니다.
더욱 건승을 기원합니다.
Josh.Management 권승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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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6 1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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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민 (114.XXX.XXX.124)

전통도 문화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문화가 소멸되어가는 과정이 되겠지요. 한 가정으로서도 그렇고 한 나라로서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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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9 09: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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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웅 (114.XXX.XXX.124)

쌍용자동차 최기웅부장입니다. 선생님의 그분에 대한 마음을 알것같습니다. 저희 집안에도 그렇게 건강하시던 손위 매형께서 갑자기 간암판정을 받아 얼마 못사실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이제 회갑인데 참 안타깝습니다. 선생님 항상 건강하시고 항상 좋은 말씀 많이 남겨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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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9 09: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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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203)

새봄이면 새순이 올라와 묵은 풀을 덮습니다.
한세대가 사라지는 느낌이 제게도 닿습니다.
집안이 번성한 댁을 경이롭게 봐라본 시절이 있었습니다.부모님 두분다 단신월남하신 분들이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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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7 09: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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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국 (110.XXX.XXX.188)

황 선생님!

그사이 큰 슬픔을 당하셨군요.

저는 위로 형도 안 계시고

아버지께서 이북에서 단신으로 내려 오셔서 집안 같은 것도 없어서 잘은 모릅니다만.

없는 만큼 더 대단해 보이고 커 보이는 그런 것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게 있어서 더 깊이 와닿는 거 같습니다.

"내 위로 아무도 없다는 건... "

하지만 오늘은 여전히 아름다우니까 그걸 더 많이 찾으셔서

이왕이면 즐겁고 복되게 사시길 부탁 드리겠습니다.

뭔가 위로를 드리고 싶은데 재간이 없는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한승국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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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6 22: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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