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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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사과

김홍묵

2011년 09월 26일 (월) 01:42:44

영화 ‘최초 병기 활’이 엄청난 관객을 모으고 있습니다. 활 얘기가 나왔으니 고금의 활의 명수들이 솜씨를 겨루는 활쏘기 대회 에피소드가 생각납니다. 사람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활로 사과를 맞히는 대회입니다. 맨 처음 영국 사수가 50m 밖에서 사과를 명중 시켰습니다. 그는 관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나는 로빈 후드다”라고 외쳤습니다.

그 다음 스위스 사수는 100m 밖에서 쏘겠다고 했습니다. 그도 역시 명중시키고는 “나는 빌헬름 텔이다”라고 신분을 밝혔습니다. 박수 소리가 더 요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한국 사수는 150m 밖에서 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화살은 사과 대신 사람의 이마를 맞히고 말았습니다. 분노한 관중들이 “너는 누구냐”라고 외치자 “나는 쏘리다 ( I'm sorry)"라면서 총총 사라졌다고 합니다. 하필 과녁이 사과였는지는 잘 모릅니다.

아무튼 사과의 계절입니다. 연두색, 노란색도 있지만 사과는 빨간색이 대종입니다. 20대 처녀처럼 싱그러운, 때깔도 좋고 맛도 좋은 사과. 극지방과 열대 우림지역을 제외하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사랑받는 과일입니다. 하지만 사과는 서양에서 맛과 빛깔보다 문화적, 역사적 사건과 의미의 상징으로 더 부각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사과는 아담과 이브의 사과입니다. 여호와(Jehovah 히브리어로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유일신)가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떼 내어 만든 여자가 이브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벌거벗고 살면서도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창조주는 그들이 사는 에덴의 동산 한 복판에 생명의 나무를 자라게 하고, 그 열매를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되지만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이른바 ‘금단의 열매’입니다.

유혹에 약했던 이브는 어느 날 뱀의 말을 듣고 그 열매를 따 먹고 아담에게도 먹였습니다. “이 열매를 먹었다고 죽을 까닭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처럼 선악을 가릴 줄 아는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뱀의 유혹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알았고, 무화과 잎을 엮어 옷을 만들어 입었다고 합니다. 선과 악을 어떻게 구분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파리스의 사과입니다. 파리스(Pari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의 왕자였습니다. 싸움의 여신 에리스(Eris)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Thetis)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앙갚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자에게’라고 새겨진 황금 사과를 연회장에 던졌습니다. 아름다음을 뽐내던 아테나(Athena), 헤라(Hera), 아프로디테(Aphrodite) 여신이 서로 사과를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이자 제우스(Zeus)신은 파리스에게 그 심판을 맡겼습니다.

파리스는 전장의 무훈(아테나), 세계의 주권(헤라)을 주겠다는 약속을 뿌리치고, 인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맺어주겠다는 아프로디테의 약속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Menelaos)의 조신한 아내 헬레네(Helene)를 유혹하여 트로이로 데려갔습니다. 헬레네는 서양에서 미녀의 대명사로 불리며, 최고의 여성미를 갖춘 훌륭한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여성의 이름 헬렌(Helen 영국), 엘렌(Helene 프랑스), 헬레나(Helena 독일), 엘레나(Elena 스페인 이탈리아)들은 그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파리스의 심판과 선택은 불행의 전조였습니다. 왕비를 도둑맞은 그리스는 천만 원정군을 편성하여 트로이를 10년간 포위 공격한 끝에 목마(木馬) 전술로 트로이 성을 함락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Achileus)의 유일한 급소인 발뒤꿈치를 활로 쏘아 쓰러뜨린 파리스와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 헬레네의 이야기는 호메로스(Homeros)의 서사시 일리아스(Ilias)를 비롯한 수많은 문학작품과 회화의 소재로 등장했습니다.

세 번째는 빌헬름 텔의 사과입니다. 14세기 초 스위스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Habsburg) 가문의 지배를 받아 왔습니다. 총독 게슬러의 횡포와 압정은 극심해 보리수 밑에 창을 꽂아놓고 그 위에 자신의 모자를 건 다음 행인들에게 절을 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빌헬름 텔(Wilhelm Tell)은 여섯 살 난 아들을 데리고 그 앞을 지나다 절을 안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습니다.

게슬러는 텔에게 아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얹어 놓고 화살로 맞히라고 명령했습니다. 텔은 정확하게 사과를 맞혀 떨어뜨렸으나 몰래 감추어 두었던 또 하나의 화살이 땅에 떨어져 낭패를 당했습니다. “그 화살은 무엇이냐?” 게슬러의 추궁에 텔은 태연히 “사과를 맞히지 못했을 때 이 화살로 당신을 쏘아 죽일 작정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화가 난 게슬러는 텔을 결박하여 배에 태우고 루체른 호반에 있는 감옥에 보내 죽이려고 했습니다.

항해 도중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쳐 배가 전복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놀란 게슬러는 배의 조정에도 능한 텔의 결박을 풀어주고 풍랑을 벗어나도록 했습니다. 배가 무사히 뭍에 도착하자 텔은 재빨리 도망쳐 숲에 숨어 있다가 게슬러를 활로 쏘아 죽였습니다. 이 사건이 봉화가 되어 스위스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전설은 실러의 희극과 로시니의 오페라로 유명해졌습니다.

네 번째는 뉴튼의 사과입니다. 아이작 뉴튼(Issac Newton 1642~1727)은 영국의 물리학자, 천문학자, 수학자이자 근대 이론과학의 선구자입니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손재주가 있고 상상력이 풍부했던 뉴튼은 1661년 케임브리지대학에 들어가 수학하던 중 1664년부터 2년에 걸쳐 페스트가 크게 번져 고향인 링컨주(州) 물소프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유명한 3대 발명품인 만유인력(萬有引力)의 법칙, 미분적분법, 광선의 분석은 이때 착상을 얻은 것이라 합니다.

근대 과학의 원조가 된 뉴튼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사과가 나무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발견한 법칙이라고 합니다.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뉴튼은 장성하여서는 반사망원경을 제작하고 의회의원, 조폐국 장관, 왕립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지만 그의 과학적 업적은 결코 작위에 뒤지지 않습니다.

혹자는 유럽의 문화를 낳게 한 네 개의 사과로 위의 신화, 전설, 업적을 들기도 합니다. 아담과 이브의 사과는 헤브라이즘(Hebreism), 파리스의 사과는 헬레니즘(Helenism), 뉴튼의 사과는 근대 과학, 텔의 사과는 근대 정치사상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원죄, 사랑과 전쟁, 우주의 신비, 압제로부터의 자유가 사과를 주제로 한 모티브에서 출발했다는 유추는 그럴 듯합니다.

역설일지 모르지만 오늘날 또 하나의 사과가 전 세계를 흥분시키고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사과(Apple)입니다. 애플은 미증유의 신제품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전 세계인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회사는 단숨에 미국 기업의 정상에 뛰어 올랐습니다. 위기를 느낀 유수한 IT 관련 회사들은 합종연횡으로 활로를 모색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사과를 한 입 베 문 애플의 로고도 전설처럼 억측을 낳고 있습니다. 잡스가 존경하던 앨런 튜링이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죽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를 추모하기 위해, 아담과 이브의 사과처럼 인류 운명을 바꿀 거라는 확신으로, 아이작 뉴튼을 기념하기 위해, 아니면 토마토와 구분하기 위해 그런 모양으로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창업자 잡스가 병마로 은퇴한 것도 로고와 연관된 것인지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각인된 사과는 어떤 것일까요? 사과와 연결 지어 연상되는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억지 예를 든다면 탈세혐의를 받고 있는 강호동의 사과(謝過)정도랄까. 대신 알맹이 없는 ‘사과 상자’만 떠오르니 떨떠름할 뿐입니다. 만 원짜리 헌 돈 2억 원이 들어간다는 사과상자 말입니다. 문명을 바꾸기는커녕 그런 상자는 죄악을 확대재생산하는 역할을 할 뿐이어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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