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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는 가라
김흥숙 2007년 05월 10일 (목) 09:32:30
오랜만에 내리는 비, 문득 몇 해 전 부여를 적시던 비가 생각납니다. 낮은 건물들의 어깨 위에 턱을 괸 하늘이 정림사지 푸른 마당에도 동남리 낡은 골목에도 묵은 연인의 시선 같은 비를 뿌렸었지요.

501-3번지, 신 동엽 시인 댁 툇마루는 고작 팔뚝 너비, 그 끄트머리에 젖은 몸을 얹어 놓고 낮은 담 너머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저 풍경을 보셨겠구나, 뜨거운 가슴 누르며 이 툇마루 위 서성이셨겠구나, 누르고 누르다가 그만 병이 나셨겠구나… 시인의 시간을 한참 넘겨 살고 있는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올 초엔 부여군에서 생가 주변에 신 동엽 문학관을 세운다고 발표하더니 엊그제는 문화재청에서 생가를 문화재로 등록하겠다고 예고했습니다. 혹 시인에 대한 갑작스런 관심과 올해 치러질 선거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까, 혼자 고개를 갸웃거려 봅니다.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漢拏에서 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꼭 40년 전 시인이 쓰신 “껍데기는 가라”는 선거철이면 늘 상기되고 애용됩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스스로 껍데기에 불과한 사람들이 남보다 앞서 이 시구를 인용하곤 하지요.

앞으로 일곱 달, 선거가 끝날 때까지, 신문과 텔레비전엔 자유 민주주의가 양산한 껍데기들이 주인공 노릇을 할 겁니다. 귀 닫고 눈 돌리고 싶을 때마다 시인을 생각하면 어떨까요? 아늑한 골목 안에 들어 앉아 문밖 사정 외면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푸르게 외치던 시인입니다. 꾹꾹 참고 보고 들어 껍데기 속에 숨어 있을지 모를 알맹이를 찾아내야 합니다. 도저히 찾을 수 없으면 언젠가 알맹이가 될 씨앗이라도 하나 뿌려두어야 합니다. 시인이 “錦江” 제 12장에서 노래한 의지의 낙관을 흉내라도 내야 합니다.

“…
가는 곳마다,

짚신을 삼고
멍석을 짜고
노끈을 꼬고
구럭을 얽고
果樹나무를 심고
채소씨를 뿌렸다.


그리고 우리가
혹 이 멍석 쓰지 못하고
이 채소와 과일 먹지 못하고
딴데로 가게 된다 할지라도,

이 다음날 누군가가 이곳에
와, 멍석을 쓰고
채소와 과일을 따먹게 될게 아닌가?

모든 사람이 다 이렇게
한다면, 어디 가나 이 지상은
과일과 곡식,
꽃밭이 만발할 것이요
모든 農場은
모든 人類의 것,
모든 천지는 모든 백성의 것
될게 아닌가.”

황사 씻는 빗속, 부여읍 동남리 시인댁 툇마루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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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뜰 (169.XXX.XXX.21)
저녁에 저는 4학년 아들아이와 이원수 선생님의 시집 '나무야 나무야'를 읽습니다. 아이가 잠들면 저는 부리나케 메뉴를 바꿉니다. '미래의 부자들'과 같은 재테크 류, 그리고 '대치동 엄마들의 자녀 공부법'과 같은 자녀 교육서로... 다음날 새벽이면 남는 것은 피로와 짜증, 그리고 약간의 강박입니다. 정말이지 행복은 자신만을 위한 싦에서는 얻어질 수 없는 법인가 봅니다. 사색과 성찰의 시간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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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31 15: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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