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내려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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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내려오며

임철순

2011년 11월 03일 (목) 00:07:02

10월의 마지막 일요일, 고교 교우회 등산행사가 열린 북한산에 다녀왔습니다. 도선사 주차장에서 만난 우리 동기들은 용암문을 통해 산에 올라가 늘 모이는 장소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행사가 끝난 뒤 어쩌다가 나는 혼자 떨어지게 됐습니다. 예년에 늘 그랬던 대로 친구들이 동장대 대동문 쪽으로 내려간 줄 알고 서둘러 쫓아갔지만 종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휴대폰도 통하지 않아 답답했는데, 문자로 겨우 연락이 닿아 알고 보니 그날은 웬일인지 원래 올라왔던 길로 내려갔다는 것이었습니다.

투덜거리며 온 길을 되짚어 혼자 걷는 동안 그 뻔한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해서 엉뚱한 곳으로 접어들기도 했습니다. “이리 쭈욱 가면 용암문이 나온다”는 말을 믿고 가보니 막다른 성벽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에라, 이왕 늦은 것 천천히 가자 하고 단풍을 찬찬히 들여다보거나 산 사진을 두루 찍었습니다. 처음 산에 올라올 때 편했던 내리막길이 내려갈 때는 바로 오르막길이었습니다.

용암문을 나와 이제 내리막길만 남은 곳에서 바위에 앉아 땀을 식히며 산을 내려가는 일과 방법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1주일에 서너 번씩 산을 찾는 ‘산의 시인’이성부(李盛夫ㆍ69)는 어느 시에서 ‘내려가는 길이 더 높은 곳에 이르는 길이라고/산이 나에게 가르친다’고 했던데, 그런 깨달음까지는 못 되더라도 뭔가 제법 그럴 듯한 생각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가는 사람들의 생각을 잘 알고 싶었습니다.

산에서 내려갈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내려가는 게 올라가는 것보다 더 위험하고 어렵다는 것입니다. 바위에 앉아서 쉬는 10여분 동안 여러 사람이 이 말을 하며 지나갔습니다. 내려갈 때 더 조심해야 한다는 말, 나이 들수록 관절이 어떻다는 말. 그리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이제 산에 올라오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 올라오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친절하고 자랑스러운 답변을 나는 길 곁에서 다 듣고 있었습니다.

검고 파란 체크 무늬의 스웨터로 커플 룩 차림을 한 젊은 남녀는 낙엽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손을 잡고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그러던데, 자기 젊었을 때는 산에 낙엽도 없었대.” “왜 없었대?” 그 남녀는 가랑잎이 겨울 땔감이었다는 것을 아예 모르는 세대였습니다. 제3자에게 아버지를 이야기하면서 ‘당신’이라는 말 대신 ‘자기’라고 하는 것도 나로선 귀에 거슬렸습니다. 그들은 낙엽이 있고 없고를 이야기하는 세대이지만, 낙엽이라고 하면 나는 낙엽족이라는 말을 생각하는 나이입니다.

젊은이들은 별 걱정 없이 산에 오르고 별 생각 없이 내려갑니다. 내일은 또 다른 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 많은 노인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산을 올라올 때, 그리고 산의 목표지점에 다 왔을 때 찬탄과 칭송의 박수를 받습니다. 그날도 팔순이 넘은 어르신이 후배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과연 저 나이에 나는 이곳까지 올라올 수 있을까, 아니 저 나이에 나는 과연 이 세상에 있기나 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내려갈 때는 거의 환자처럼 남의 부축을 받아야 하거나 젊은이들에게 폐를 끼치는 경우를 자주 보았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다 내려갔을 때 젊은이들은 다음에 만날 약속을 구체적으로 하지만, 나이가 많으신 분들은 대체로 그냥 헤어진다고 합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 내려가는 60대 친구 몇 명의 대화를 듣는 동안 괜히 내가 슬퍼졌습니다. 다시 몸을 일으켜 산에서 10여 분 내려오노라니 도선사의 불공 소리가 잘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대입 수능시험을 열흘 앞둔 날, 산사를 찾은 신자들의 안타까운 열망과 기원이 안타깝고 애처로웠습니다.

산에서 여러 소리를 듣다 보니 이번에는 이성부의 시 <귀가 밝아진다>를 읽어보게 됩니다. ‘길가로 열린 내 창에는/세상의 온갖 크고 작은 소리들이 자주 넘나든다 (중략) 놀이터에서 온종일 혼자 놀던 이웃집 아이 잠들어/키 크는 소리 들리고/밤이면 가등 불빛에 힘없이 귀가하는 가장들의 긴 그림자도/따라 한숨 쉬는 소리 들리고/산에 두고 온 내 발자국 지워지는 소리 들리고//높은 집들에 가린 내 창은/갈수록 눈 어두워지고 귀만 밝아진다.’

고은 시인은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못 본/그 꽃’이라고 노래했지만, 산에 다니는 것은, 특히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은 귀가 점점 더 밝아져서 사물과 사람의 많은 소리를 듣게 되는 일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러니 더 많이 산에 오르고 더 많이 산에서 내려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김해진 (211.XXX.XXX.129)

임주필님, 칼럼 잘 읽었습니다. 항상 명징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삶에 대해 가르침을 주시는 글,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저도 이칼럼을 읽어며 이번주에는 등산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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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7 09: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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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j56 (211.XXX.XXX.88)

가끔식 뚝배기 청국장같은 글을 써 주시는 임철순님!
왜 그렇게 구수하면서도 쾌쾌한 냄새가 진한 글을 써주시나 했더니
산행 을자주하셔서 아주 작은 소리까지 잘 들으셔서 그런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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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7 08: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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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211.XXX.XXX.129)

저 청국장 되게 좋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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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7 08:4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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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길순 (211.XXX.XXX.129)

요즘은 둘레길이 잘 만들어져서 주로 대화를 위한 만남으로 활용되더군요. 젊건 늙건 사람들이 넘쳐요. 언제 그 길 함께하십시다. 안녕하시지요? 채길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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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4 08:3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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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휘동 (211.XXX.XXX.129)

담연이 요전 일요일에 길을 잃어 혼자 내려오면서 득도를 한 것 같구먼.
우리가 한 세상 살면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많은 난관을 겪는 산을 오르고 또 내려오지 않는가. 산에 오를 때는 그야말로 희망에 차서 힘을 내며 오르지만 내려오는 것은 나도 모르게 추락한다고나 할까. 그리고서 또 산을 오르고 또 떨어지고 하는 것이 인생이 아닐런지. 나이가 들어 더이상 산에 오르지 못할 때지만 마지막 힘을 내어 조그만 동산이라도 오르는 것이 황혼에 하는 일이겠지. 마지막 등산은 추락하지 말고 서서히 세상만사를 깊게 음미하며 하산한다면 성공한 삶이 되지 않을까? 긴 시간의 삶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면서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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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4 08:3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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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태식 (211.XXX.XXX.129)

생각들이 많아지는 계절입니다. 지난 번 '가을이~'와 '잊히면서 살기' 등을 읽고 댓글을 달아올렸는데요, 보내기를 클릭하면 날ㄹ아가버리더군요. 이번 것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임주필님의 인격과 교양이 날로 원숙 고매해지는 모습에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철학자의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만 어설픈 자기만족에 머무는 것이 고작인데, 임주필님은 일가를 분명 이루고 있어 철학의 반열에 올랐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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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4 08: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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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85)

'여기가 어디냐고'- 이성복(1952~ )

<붉은 해가 산꼭대기에 찔려
피 흘려 하늘 적시고,

톱날 같은 암석 능선에
뱃바닥을 그으며

꿰맬 생각도 않고
-여기가 어디냐고? -맨날 와서 피 흘려도 좋으냐고?>............ 산에 오르려면 저녁 무렵에 올라서 온통 핏빛으로 물든 하늘까지 보심이 어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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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3 23: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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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211.XXX.XXX.129)

그게 피였군요. 볼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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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7 08: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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