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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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기 위하여

오마리

2011년 12월 01일 (목) 00:17:22

“용서해다오. 용서해다오.”
“모두 내 탓이야. 내가 너들을 망치게 했어.”
이 말을 듣기까지 삼 십 년도 넘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내 몸을 끌어안고 엉엉 우시는 노인과 함께 나도 눈물을, 아니 통곡을 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초로의 노인과 팔십 중반이 훨씬 넘은 노인이 껴안고 우는 모습이 어땠을까요? 그렇게 운다고 하여 이제 흐르는 물을 가꾸러 되돌릴 수도 없는 것임을 왜 사람들은 죽음이 가까워서야 깨닫는지 그것이 슬펐습니다.

비바람이 부는 벌판, 차가운 웅덩이에 빠진 두 발이 붙박이처럼 묶여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던 시기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너무나 버거워 감히 그 크기와 무게를 재볼 수 없었던 외로움, 미움과 원망으로 나의 삶은 축축하고 어두운 습지를 방황하던 때였습니다. 사람에게 살의를 느낀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인가, 하는 것을 생에 오직 한 번 체험한 것도 그 당시였습니다.

내 젊은 날을 피폐하게, 내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었던 원인제공자 중 한 사람이었던 한 노인, 그 분을 언니와 함께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고 실천에 옮긴 일은 지금 생각해도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거동이 힘들만큼 병들고 곧 이 세상과의 작별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고령의 노인, 남편 없이 홀로 살아왔던 그 분이 이제 자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때, 외아들과 함께 기거할 수 없는 상황이 애처로웠습니다. 나처럼 딸이 없어 슬퍼하는 그 분은 어둠의 시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죄로 많은 한을 지고 살아야 했던 여성으로, 내가 그 분을 찾기로 했던 것은 그 무렵 다만 그 분의 운명에 대한 측은지심이 내 가슴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0년 전 자신의 아내를 유혹해 가정을 파탄 내고 결국 딸까지 강간 살해했던, 독일인 의사에 대한 복수를 결행한 프랑스의 74세 된 노인에 대한 기사를 읽고 나는 그의 분노와 증오,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프랑스 노인은 독일정부가 독일인 범죄자의 프랑스 인도를 거부하자 자신의 비용으로 사람을 고용하여 76세의 범인을 자신이 거주하는 프랑스로 납치하였는데 곧 법정에 세우게 된다고 합니다. 평생 아내를 유혹하고 딸을 강간해 죽였던 독일노인에 대한 원한을 풀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던 이 노인은 자신 또한 납치 사주에 해당하는 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 한이 얼마나 컸으면 이제 천수를 누린 노인이 또 다른 천수를 누린 한 노인을 납치하여 법정에 세우고 싶었을까요? 아무리 나이를 먹어가도 용서는 쉽지 않은가 봅니다.

그렇습니다.
분노와 증오. 그것은 핵폭탄과 같은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파괴력을 자제할 수 없을 때 사람이 해선 안 될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사람을 미워하고 해치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태생적으로 정신질환 요소를 지닌 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상황과 환경으로 하여 사람이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만약 나를 상처 입힌 사람이 나와 무연(無緣)인 사람들이라면 해결 방법은 훨씬 쉬우리라 생각합니다. 그냥 무시해버리거나 스쳐갈 수 있습니다. 내가 받는 고통이 아무리 크더라도 용서와 치유가 의외로 쉽게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살아왔던 남편, 자식, 형제, 부모, 시부모,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살던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와 미움은 깊고도 깊어져 결국 한 영혼의 사망까지 이르게 합니다. 그것이 곧 정신적 살인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그러나 정신적인 살인은 곧 육체적 살인이 될 수도 있으니 그처럼 무시무시한 것도 없지요. 그래서 가족에 대한 관용과 용서는 타인에 대한 그것 보다 어려워‘미워도 다시 한 번' 이란 정서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용서와 화해의 그날 이후, 나는 귀국할 때마다 항상 그 분을 찾아갔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노인이 먹기 좋은 음식을 구입해 드리거나 청소를 해드리고 도란도란 얘기도 하며 그 분의 못 다한 끝없는 얘기들을 몇 시간씩 들어주다가 오곤 했습니다. 딸이 없는 그 분은 아들에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고 눈치가 보인다는 한탄도, 아들이 주는 생활비와 약값이 빠듯하다는 하소연도 내게 마음 편히 말하시며 출국 전날에 인사를 가면 언제 또 오느냐며 내 옷자락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래 우리가 가족이지, 모다 남들은 필요 없어.”
“모두들 내 똥 지네들더러 치우랄까봐 아예 오질 않아.”
힘없는 병든 노인네, 라며 소외 속에서 사는 그분이 나의 뜻밖의 방문에 하신 말입니다. 이제 가족이라고 하는 그 말, 내겐 가슴이 한없이 저리는 표현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날 즈음에서야 때 늦게 이런 말을 하시는 노인은 나의 전(前)시모(媤母)입니다. 내 아이들의 친 할머니이지요. 어떤 이들은, 지금은 아무 인연도 없는 노인을 왜 찾아가는지 한국적 사고방식으로 의아해 하기도 하고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분을 찾아가는 것은 털끝만한 미움도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여성으로서 그 분에 대한 연민이며 아이들의 할머니에 대한 애정입니다. 곧 세상을 떠날 사람이기에 마지막 정성과 사랑이라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땅에 떨어져 썩어야 하는 한 알의 밀알처럼 왜 젊은 날 나를 온전히 죽일 수 없었을까, 하는 회한과 나도 언젠가 더 늙어서 그분처럼 딸이 없는 서러움과 외로움에 울 거라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나또한 그 분에게서 용서받을 일이 왜 없겠습니까?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고백하건데 나 역시 그 분을 그때도 지금처럼 연민은 했지만 존경한 적이 없었습니다. 일제 치하에 태어난 그 분과 전후 세대인 나, 그 세대 차이의 문제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매우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물과 기름처럼 모여 살았던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상황과 외아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사랑, 환경적인 갈등은 서로 사랑할 수 없는 지경으로 이르게 한 것입니다. 젊었던 그 시절의 나는 그리 현명하지 못했던 사람었던 것 같습니다. 왜 그 분이 지닌 운명의 한을, 그 분의 슬픔과 불행에 대한 화풀이를 그의 아들이 아닌 내가 모두 도맡아야 하는가, 하는 억울함이 나의 이성과 관용을 마비시켰던 것입니다.

용서하라, 그래야만 행복해진다.
상처는 우리의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 필연적으로 있어야 한다, 우리를 상처 입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 또한 용서를 베풀 기회를 얻는 것이다, 인간존재에 대해 분노와 미움을 가지고 싸움에서 승리를 한다 하여도 그것은 삶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일시적이며 결국 죽게 되어 있기 때문이고 결국 우리를 아프게 한 사람들도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니 결국 사라져 갈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 용서하라, 고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말합니다.

나는 한 때 나의 시어머니였던 분을, 죽어도 내가 죽은 후라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던 그 분을 용서했습니다. 차라리 그분이 세상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했던, 태산처럼 컸던 증오도 맑은 샘물과 같이 고요하게 가라앉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현자도 아니고 성자도 아니고 오직 감성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인지 달라이 라마의 지침처럼 아직도 분노와 미움을 모두 거둘 수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용서해야만 행복하다고, 용서하지 않으면 그 고통은 내가 지고 갈 몫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이 나이에도 쉽지 않습니다.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첫 눈이 내리고 호수에서 불어오는 눈을 실은 바람이 살을 앱니다. 송년이 가까워지는 이때쯤 산책을 할 때면 많은 상념이 가슴을 훑고 지나갑니다. 올해도 작년처럼 같은 명제, 용서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소모했고 앞으로도 소모할 명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미망의 덧과 같은 기억을 정리하지 못한 나의 소치를 반성하고 있습니다.

못 다한 슬픔이 남아 있는 탓이겠지만 우선 마음부터 비워야 용서를 할 것 같습니다.
더 많이 버려야 할 것들이 남아 있어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누군가도 나의 의도적이지 않았던 언행에 상처입고 나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 그들이 나를 용서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행복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복한 새해를 바란다면 용서부터 해야 한다고 하니까요.

jsk (121.XXX.XXX.90)

아픈 상처를 고스란히 내놓으심
정말 용감하십니다.
아니 그래서 이 글이 더 진실한 고백임을 신뢰합니다.
우리도 누구든지 가까운 사람들에게
용서하기 어려운 피해를 당하고 삽니다.
정말 살인이 날정도로 미운 사람들이 있지요
미워한들 그 실수와 피해가 줄어진다면 마음껏 미워해야겠지요
마리님처럼 용서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빨리 가져야
인생의 비밀을 가장 빨리 터득하는 것인줄 알면서도
왜 그리 신속하게 되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새해 우리나라 사람 들이 좋아하는 828282 로 용서해야겟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