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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하는 마음
신아연 2011년 12월 26일 (월) 01:27:57
해 바뀌기 전에 얼굴이라도 보자는 모임 끝에 누군가가 “자, 그럼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혹시 내년에 아홉수 든 사람들, 신수 조심 하시구요.”라고 해서 모두 웃었습니다. 듣자하니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것도 목사까지 낀 모임에서 나눌 덕담은 아니었기 때문일 테지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내년이면 마흔아홉으로 제가 아홉수에 들게 되나 봅니다. 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적절한 때에 들은 ‘아홉수’라는 말에 ‘한 해 운세’니 ‘토정비결’ 같은 말이 덩달아 떠오릅니다.

그뿐 아니라 이맘때면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 사는 집으로 스며들어 토방에 널린 이 신 저 신을 신어보고 저한테 맞는 것을 훔쳐 신고 간다는 야광귀나 부엌 아궁이에 살면서 그믐날이면 한 해동안 그 집에서 일어난 일을 옥황상제께 낱낱이 고해 바친다는 조왕신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옛날 어떤 아낙은 자기 집안의 안 좋았던 일을 하늘이 알게 될까봐 조왕을 아궁이에 아예 가둬두거나, 나오더라도 입이 붙어 아무 말도 못하게 아궁이에 엿을 붙여 두기도 했다니 그 어처구니없는 순박함에 실소를 머금게 되면서도 지금 사람들이 미신이라고 간단없이 치부해 버리는 것들에 대한 옛사람들의 정중하고 경건한 자세를 돌아보게 됩니다.

아무려면 부지깽이에도 귀신이 붙어 있다는 말을 믿기야 할까만 그런 것들을 믿고 안 믿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살이의 한 순간 한 순간을 내 힘이 아닌 누군가의 자비와 음덕, 측은히 여김에 깃대고 그 결과를 두려워하며 사는, 삶에 대해 ‘저어하는 마음’을 깨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비록 세련되고 정교한 자각에는 미치지 못한다 해도 자연을 포함하여 만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고 그 존재는 사람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때로는 안위하고 때로는 책망하며 사람의 한평생을 도도히 끌어간다는 믿음으로 생을 운행하는 원초적 더듬이 같은 것을 옛사람들은 가지고 있었다고 할까요. 저속한 표현으로 ‘겁대가리를 상실한’ 현대인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이야기지만 그래도 세모에 이르니 전에 없이 오만불손했던 인간의 태도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올해는 특히 자연의 크나큰 재앙이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났고 사람끼리의 모지락스런 일도 참 많이 있었습니다. 결국은 바닥이 날 재원을 마치 무한정인 것처럼 함부로 써대고 더 나쁘게는 탐욕에 겨워 움켜쥔 채 이웃과 나누지 않았습니다. 악독한 독재자는 아니었다 해도 우리 모두는 자연 앞에, 그리고 같은 생명체 앞에 잔인하고 거만하고 무심하며 때로는 주객전도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사는 데 가장 소중한 것을 무상으로 받으면서도 사람끼리는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치사스레 값을 매겨 서로에게 인색하게 굴고 아름다운 것들을 왜곡하고 훼손해 놓은 장본인이면서도 그 악행과 우매함의 결과에 대해서는 핑계거리와 원망할 대상을 찾기 바빴습니다.

내 죄업에 대한 신의 심판을 두려워하기는커녕 게으름, 태만, 직무 유기의 죄목을 씌워 신을 오히려 피고인석에 세우고 그 죄과를 조목조목 따졌습니다. 자연재앙과 기아, 전쟁과 착취 따위를 여적지 그냥 보고만 있으니 신의 죄가 어찌 중하지 않겠냐며 준엄하게 신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당신이 신이냐고 삿대질하거나 아니면 아예 신이 없다고 합니다. 허황되고 오만한 인간에 의해 재판정에 세워진 신은 초라하고 남루한 피고일 뿐이니 결국 현대인에게 더 이상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반구에서 맞는 세모의 여름밤, 귀뚜라미 울음을 들으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신을 신고 가버릴까봐, 그래서 한 해 동안 재수가 없을까봐 잠을 설치며 토방의 신을 지키던 옛사람, 조왕에게 정성을 다하며 집안의 평안을 의탁하던 순진한 그 마음조차 닮고 회복하고 싶을 만큼 함부로 살아온 지난 시간이 부끄럽습니다.

백년 래 이상저온이라는 한여름 속에서 어제 맞이한 크리스마스는 정말이지 모처럼 덥고 화창했습니다. 덥거나 춥지 않은 여름과 겨울, 아니면 지나치게 춥고 더운 겨울과 여름을 맞을 수밖에 없는 것도 모두 인간의 탓이기에 인간에 대해 서운하고 괘씸한 게 그 어느 때보다 많을 자연과 신이 그럼에도 너그러운 마음을 베푸신 것이라고 저는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또 다시 한 해를 맞이하며 새해에는 사람의 선한 본성과 나보다 큰 존재를 의식하고 저어하는 마음을 되찾고 북돋움 받을 수 있기를 나 자신과 이웃, 인류를 향해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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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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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us (210.XXX.XXX.254)
깊은 생각과 갈고 닦은 글 솜씨 그리고 글을 놓지 않으시려는 신념에 늘 놀랍니다.
오늘 처럼 내일도 좋은 글을 읽게 해주시길 멀리서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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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8 14:5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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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완 (110.XXX.XXX.249)
신아연 선생님
선생님의 글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삶에 가장 소중한 것들을 거저 받으면서도 사람들 끼리는 인색했다는 말씀이 너무너무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반성하면서 새해를 맞이해야지요. 감사합니다.
이종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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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7 14: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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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상규 (110.XXX.XXX.249)
한해 동안 좋은 글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년 한해도 용이 승천하는 좋은 글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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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7 09: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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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79)
한 해를 보내면서, 새해를 맞으면서 함부로 낭비한 자연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저도 따라 해 봅니다. 유치원 다니는 손녀가 '환경 살리기 운동'을 한다고 하기에 그 운동이 제 에미 애비에게도 전해졌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하루 온종일 컴퓨터 켜놓기, 빈방에 환하게 불 밝히기, 하얀 이면지 다시 쓰면 좋으련만 쉽게 버리기, 수돗물 아까운 줄 모르기, 가까운 거리도 꼭 차를 타고 가기.... 잔소리 하기도 힘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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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6 23:3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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