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병 어린이 양형도의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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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병 어린이 양형도의 30년

임철순

2011년 12월 27일 (화) 01:04:02

2011년 세밑에 알려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은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북한사회의 변화와 향후의 남북관계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그의 사인이 중증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성 쇼크의 합병이라고 발표됨에 따라 심장과 심장병에 대한 관심도 커졌습니다. 특히 나이 많은 분들은 지금처럼 추운 겨울에 심장 쇼크를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수술로 새 생명을 얻은 지 올해로 30년이 지난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 양형도(梁亨道) 군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어졌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나라 심장의학 발전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나는 사건기자 시절이던 1981년 5월 23일, 한국일보 사회면 톱으로 ‘섬마을의 꿈 꺼져간다’는 기사를 썼습니다. 경남 통영시 용남면의 낙도 어의도(於義島) 소년 형도(당시 11세)는 좌심실과 우심실 사이에 구멍이 뚫린 심실중격결손증(心室中隔缺損症)에 동맥관개존증(動脈管開存症)이 겹쳐 늘 숨이 가빠했고 수술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웠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병명도 모르는 데다 막대한 돈을 댈 수 없어 애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1981년 12월 어의도에서. 오른쪽부터 양형도와 필자, 유경두 교장, 형도 아버지 양상준씨.

형도의 심장 이상을 안 어의초등학교 유경두(柳慶斗ㆍ작고) 교장은 서울 한양대병원에서 의료기사로 근무하는 사위 이영수(李永洙) 씨에게 아이를 살리자고 호소했습니다. 이 병원 흉부외과의 김근호(金近鎬) 박영관(朴永寬) 이흥재(李興在) 교수등 의료진은 무료 검진을 통해 병명을 확인했습니다. 이어 박영관 교수가 친구인 한국일보 박승평(朴勝平) 사회부장에게 제보를 함에 따라 형도의 사연이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기사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하루 만에 당시로는 거액인 1,000만 여원의 성금이 들어왔습니다. 한양대병원은 앰뷸런스를 내어 형도 수송에 나섰습니다. 백형인(白炯寅) 한국일보 사진부장 대우, 이영수 씨와 함께 앰뷸런스를 타고 어의도로 가는 동안 밤 12시께 진주 부근에서 차가 고장 나 레커차로 예인되는 바람에 새 앰뷸런스를 불러 그곳까지 오게 했습니다. 그런 극성 끝에 거제도 성포에 차를 세운 뒤, 쪽배를 타고 어의도에 들어가 형도를 실어왔습니다.

형도는 안쓰럽게 귀여웠습니다. 가슴에 손을 대보면 갓 잡힌 물고기가 수분 적은 모래밭에서 펄떡펄떡 뛰는 듯 절박한 목숨의 고동이 손바닥을 울렸습니다. 0.55㎢의 작은 섬, 36가구 주민 중에는 문맹도 있었고 학생은 겨우 42명으로 1, 3, 5학년 격년제 수업을 하는 작은 학교. 축구공을 잘못 차면 바로 바다에 빠지는 운동장…. 5월 24일 입원한 형도는 6월 4일 수술을 받고 7월 4일 퇴원했습니다. 오른쪽 윗눈꺼풀이 처진 안검하수증(眼瞼下垂症) 교정수술까지 덤으로 받은 형도가 새 심장 새 얼굴로 귀향한 날, 섬마을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형도의 수술 성공을 계기로 한국일보는 ‘심장병 어린이를 구하자’는 시리즈를 시작하며 대대적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형도에 관한 기사를 원 없이 많이 썼던 나는 박진열(朴珍列ㆍ현 한국일보 부회장) 기자와 둘이서 10회 연재를 하는 동안 심장병 공부를 제대로 하게 됐습니다. 오인환(吳麟煥ㆍ나중에 공보처장관) 차장이 진두지휘한 시리즈의 결론은 우리나라도 하루 빨리 심장재단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형도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져 있었고, 형도 이야기는 잡지와 KBS TV의 단막 드라마로도 소개됐습니다. 다른 언론사들도 경쟁적으로 심장병 어린이 살리기에 나섰지만 수술 성공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형도와 심장병 시리즈 덕분에 나는 1981년 8월 제 13회 한국기자상(한국기자협회) 취재부문상을 받았습니다. 기자협회에 낸 추천서는 지금은 대 소설가가 된 입사 동기 김훈(金薰) 씨가 써 주었는데, 나는 추천서를 읽고서야 비로소 내가 한 일의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가을엔 기자상의 부상으로 동남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첫 해외여행이었습니다. 필리핀에 갔을 때는 아프다는 핑계로 관광일정에서 살짝 빠져 마닐라의 필리핀 심장재단을 취재하고 왔습니다. 그 뒤 서울시를 거쳐 보건사회부를 출입할 때에도 심장병 기사를 참 많이도 열심히 썼습니다. 나는 ‘형도 작은아버지’로 통했고, 우리 아이도 살려달라는 편지와 전화를 수도 없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심장재단 설립은 숙제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산발적인 민간의 구호활동을 조직화하려고 애썼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심장재단이 설립된 결정적 계기는 1983년 11월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부인 낸시 여사가 어린이 2명을 치료해 주겠다며 데려간 일입니다. 우리를 ‘의료 후진국’으로 만든 이 사건 이후, 보사부는 국민들의 여론과 압력의 힘을 얻어 심장금고 설립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그 일에 깊숙이 간여된 나는 자연히 다른 기자들보다 먼저 기사를 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심장금고 설립은 계획대로 추진되지 않았습니다. 1981년 6월 발족한 새세대육영회가 별도로 심장재단을 세운다는 소문이 들리면서 민간의 활동은 주춤해졌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는 필리핀의 이멜다처럼 자신이 심장재단 설립을 도맡으려 했고, 결국 1984년 2월 20일 새세대심장재단이 설립됐습니다. 한국일보가 심장재단 설립 기금으로 맡아 두었던 독자들의 성금 1,000여 만원은 내가 재단에 기탁하고 왔지만, 석연치 않고 떨떠름한 기분이었습니다.

재단이 생긴 뒤에도 나는 서울시약사회(회장 김명섭ㆍ나중에 국회의원)와 함께 심장병어린이 돕기를 계속해 9명의 목숨을 살렸습니다. 그러나 2명은 끝내 숨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심장병 어린이는 1년에 5,000여 명씩 태어난다고 했는데 700만원이 넘는 수술비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새세대심장재단은 전두환 정권 몰락 이후인 1989년 6월 한국심장재단으로 법인명칭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재단 통계에 따르면 2010년 12월까지 2만3,401명의 선ㆍ후천성 심장병 환자와 4,426명의 기타 질환(얼굴기형, 콩팥 이식, 골수 이식) 환자에 수술비를 지원했고, 2011년에는 심장병 수술 900명 등 1,150명에 대해 수술ㆍ검사비를 지원한다고 돼 있습니다.

성균관대 의대 삼성서울병원의 이흥재 교수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선천성심장병 수술은 태동기(1960년 이전) 정착기(1961~1975년) 발전기(1976~1990년) 도약기(1991~2000년)를 거쳐 2001년 이후 세계적 수준에 오른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1959년 인공심폐기를 이용한 개심술이 처음 시도됐으나 1970년대 초반까지 심장 수술은 그리 활성화되지 못하다가 1977년 도입된 의료보험제도, 양형도 살리기와 같은 1980년대 초반의 ‘심장병어린이 돕기’운동 등을 기점으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급속히 발전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60여 개 병원에서 연간 약 4,000건의 수술로 국내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을 거의 다 수술해 주는 의료선진국이 됐고, 수술 성적도 사망률 2~3% 미만으로 세계 초일류 국가 수준에 올랐습니다. 어지간한 병원이면 외국의 어린이들을 데려와 심장병을 무료로 고쳐주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교수에 의하면 어린 시절 수술을 받고 살아난 수많은 환자들이 이제는 어른이 되어 우리나라에도 성인 선천성심장병 환자, Grown-up Congenital Heart(GUCH)라는 환자층이 생기게 됐다고 합니다. 이 교수는 1995년 삼성서울병원에 GUCH 클리닉을 열었지만 아직도 이들을 위한 진료시스템이 충분하다고 확신하지는 못한다니 질환은 끝이 없고 사랑의 인술도 다함이 없어야 할 것 같습니다.


	30년 뒤인 2011년의 양형도.

1970년생인 형도는 새해 42세가 됩니다. 큰 배의 선장이 되겠다던 어릴 적 꿈과 달리 동아대 금속공학과를 나와 경남 양산의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16년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홉 살, 여섯 살된 두 아들은 아버지와 달리 어려서부터 튼튼했고, 그는 등산이 취미라고 할 만큼 건강에 아무 문제없이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덧 아저씨가 되어 배가 자꾸 나온다니 이제 이 '작은아버지'와 맞먹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1974년 이후 기자생활 37년이 넘는 기간에 가장 보람있었던 일은 양형도를 비롯한 심장병 어린이를 구한 것이었습니다. 형도는 수술을 통해 새 생명을 얻었고, 나는 형도를 통해 많은 보람과 영광을 얻었습니다. 2011년을 보내면서 30년 동안의 일을 돌이켜 봅니다. 이 기간에 한국사회는 자기 아이들을 스스로 구할 수 있게 됐고, 남에게서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이제는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됐습니다. 많은 문제점이 있지만 격변의 한 세대를 거치는 동안 한국사회가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것을 심장병문제를 통해서도 새삼 다시 알게 됩니다.

조성만 (211.XXX.XXX.129)

훌륭한 일을 하셨네요. 필리핀 여행중에도 투철한 사명감으로 취재를 하셨다니 존경스럽습니다. 한알의 밀알이 풍성한 성과(심장재단)를 낳으니 뿌듯하겠네요. 대기자께 실례되는 말씀이나 독자층이 다양할 것으로 생각되어 조그만 부탁 드립니다. 우리같은 소시민은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부적절한 어휘 사용 등이 별문제 없겠지만... 쪽배로 실어 나르는 것은 화물이나 축생이고 형도는 태웠으리라 생각됩니다. 임진년 첫날부터 흰소리해서 죄송합니다. 보내주신 좋은 글도 게을러서 이제보면서.... 암요. 금년에는 더욱 더 정진하셔서 후세에 길이 남을 훌륭한 명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