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리(東里)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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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東里) 생각

김창식

2012년 01월 03일 (화) 00:32:24

해가 바뀌는 이맘때면 유독 고마운 분들이 생각나는군요. 저명한 소설가이자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지낸 고(故) 김동리(金東里, 1913~1995) 선생님도 그런 분입니다. 한국 문단의 거봉으로 칭송받는 동리 선생님과 오랜 세월을 에둘러 문단에 발을 들여놓은 늦깎이 신인 사이에 무에 그리 대단한 인연이 있을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든 오랜 세월 감춰두고 혼자 열어보며 내밀히 기뻐하는 작은 보물 상자가 있기 마련이죠. 그 속에 있는 것들이 분도기, 우표 책, 조개껍질, 곤충표본 같은 소소한 것일지라도 말이에요. 동리 선생과의 추억 또한 그러합니다. 동리 선생은 순수문학 논쟁에 불을 지폈고, 나중 삶의 행보와 보수에 치우친 정치적 입장이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동리 선생과의 일화를 떠올리면 마음이 따듯해지고 용기가 생겨나며 흠모의 정 또한 깊어집니다.

기억은 196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중고생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던 <학원>이라는 잡지가 있었어요. 각 학교의 문예반을 중심으로 문학에 뜻을 둔 학생들은 다투어 잡지에 글을 투고했는데, 일정 수준에 오른 작품은 잡지의 문예란에 실리곤 했습니다. <학원>은 중고생을 대상으로 한 문학 등용문이었던 셈인데, 그 위세가 대단했고 영향력 또한 막강했습니다.

자천타천 문학 소년이었던 나도 산문에 뜻을 두어 글을 몇 편 투고했답니다. 그 중 한 편의 제목이 '사계(四季)'였어요.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사시사철 변해가는 풍광을 묘사하고, 이에 겹쳐 사랑의 시작과 종말을 당시 한참 유행하던 감상(感傷)적인 필치로 적은 일종의 단상이었는데, 그 글이 <학원> 잡지에 실렸습니다.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글의 처음 부분을 재구성해봅니다.

- 봄의 잠 깨임.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거리는 질척이고 얼음조각이 발길에 차인다. 그래도 건물의 처마 밑 낮은 곳에는 어김없이 이름 모를 싹이 움튼다. 두엄 냄새가 싫지 않게 코에 스밀 때면 먼 산에는 연기인지 아지랑이인지 희뿌연 기운이 아른거린다. 우리의 사랑도 식물의 둥근 뿌리처럼 물이 오른다… -

그 때 심사위원으로서 글을 선(選)해주신 분이 다름 아닌 동리 선생이셨지요. 선생은 "글이 정갈하여 격(格)이 있고, 문장이 정확하며, 구성의 묘미가 있다"고 칭찬해주셨습니다. <무녀도>, <등신불>, <황토기>, <사반의 십자가> 등 걸작을 통해 대표적 소설가로 자리 매김한 동리 선생께서 고등학생인 나의 글에 대해 황송하게도 과분한 평을 해주신 것이죠. 동리 선생의 격려는 내게 뿌듯함과 용기를 주었고 언젠가 나도 훌륭한 작가가 되리라 결심했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세상일이란 뜻 같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서도 문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계속됐으나, 졸업 후 이런 저런 사정으로 뜻을 접고 사회에 진출했습니다. 일상에 함몰된 소시민으로서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밤이었어요. 불콰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언뜻 눈을 들어보니 차창에 웬 낯선 사내의 모습이 보이는군요. 세파에 찌들고 어둑한 눈빛을 한 저 수상한 존재가 누구인가? 그 모습이 나 자신임을 알아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죠.

그것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좇느라 타인의 얼굴로 타인의 삶을 살아온 중년 사내의 자화상이었습니다. 차창에 비친 낯선 얼굴은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 셈이죠. 이제부터라도 참 나를 찾아 내가 주인인 삶을 살며, 이웃을 위로하고, 궁극적으로 공동체와 인간성에 기여하는 삶을 살아야 할 텐데…. 헌데, 인간 존엄의 회복과 인간정신에 기여해야 하는 삶에 내가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아, 그렇군요, 문학을 통해서! 하긴 특별히 잘하는 일도 없으니.

차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대하고 느낀 씁쓸함은 새로운 삶을 위한 촉매제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 갖게 된 허허로운 실존에의 인식이 30여년을 훌쩍 건너뛰어 글을 쓰는 모티브로 작용한 것이지요. 이후 수필가협회 기관지인 <한국수필>에 글을 투고했고 수필가로 등단했습니다. 이 계통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어느덧 3년, 최근 그간 수필전문지와 종합문예지에 발표한 글을 모아 첫 수필집 <안경점의 그레트헨>을 발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뒤늦게나마 글을 다시 쓰게 됐으니 고등학교 때 발화된 문학에의 열정이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잠복해 있었던 모양이에요. 이제 글을 쓰지 않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잘 가늠이 서지 않지만 말입니다. 아직 문학에의 길은 멀고 힘에 부칩니다. 여러 면에서 턱없이 못 미칠 터이지만, 그 옛날 까까머리 어린 시절 동리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품격 있는 정확한 글쓰기'를 금과옥조로 여겨 이를 실천하리라 다짐해 보며….

김윤옥 (210.XXX.XXX.35)

드디어 수필집을 내셨군요.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젊은날 꾸었던 꿈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언제나 맘속에 간직했던 그런 꿈이 오늘 세속에 찌들지않는 힘이 되었겠지요.
서점 나들이 가는 날 수필 코너에서 <안경점의 그레트헨>을 찾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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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4 20: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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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114.XXX.XXX.37)

김윤옥님께 새해 인사 드립니다. 격려 감사드리며 윤옥님의 문운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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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5 15: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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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59.XXX.XXX.201)

"학원"잡지의 표지 모델의 인기도 상당했지요?.
학원 책 돌려가며 읽던 시절,차창에 비친 얼굴의 느낌을 대학입시의 글짓기의 제목이였던 "窓"과 오버랩이 되어 버리네요.
그때는 글짓기가 필수였지요.김동리 선생님의 이야기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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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3 08:2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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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114.XXX.XXX.20)

그렇습니다, 차덕희 선생님. <학원>의 표지 모델은 딴 나라 학생 같았지요.
대학 입시 글짓기 제목이 '窓'이었다니 이 또한 기분좋은 우연의 일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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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3 09: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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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주 (114.XXX.XXX.98)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아름다움은 영원한 즐거움 일러라'란 싯귀가 떠오릅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 중, 우정 보다 더한 것이 있을런지요. 향기로운 인간관계는 이 세상을 버티는 언덕이며 생명체로서의 품위를 지켜주는 힘 아닐른지요. 김 선생님, 새해에도 좋은 글로 뵐 수 있기를 기대하오며 댁내 만복이 깃드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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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3 12:2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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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114.XXX.XXX.37)

한희주 선생님께 새해 인사드립니다. 선생님 건승과 댁내 평안, 뜻하는 일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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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4 19:5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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