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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고문을 생각하며
신아연 2012년 01월 12일 (목) 00:10:39
생전에 뵌 적은 없지만 이제 영면에 들어가신 김근태 통합민주당 상임 고문이 요즘 문득문득 생각납니다. 그분의 별세가 분노와 죄의식, 빚진 마음을 느끼게 한다는 세간의 말들에 나 또한 그러하다는 ‘말부조’는 못할망정 그러한 위무의 말이 제게는 마치 구슬프고 서러운 진혼곡처럼 들립니다.

더러 만났거나 아니 만났으되 만난 것과 진배없는 가엾고 서글픈 인연들이 김 고문의 죽음으로 인해 헐벗은 혼령처럼 너울대며 다시금 의식 안으로 걸어들어 온 탓입니다.

김 고문의 이름 앞에 떳떳이 놓인 ‘민주주의자’라는 수식어가 그분이 흘린 피의 대가인 양 선명하고 달라진 세상의 새 명패 같아 감격스러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굴비 두름으로 엮여 고통받던 가족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추 30년 전쯤, 김 고문의 부인 인재근 씨를 비롯하여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에서 만났던 그 가족들 말입니다. 더러는 눈빛만큼은 형형했지만 국가로부터 무단히도 미움과 트집을 잡히며 가난하고 남루하게 살아가던 사람들, 남편과 자식, 형제의 기한없는 옥살이에 기다림에는 이골이 났다면서도 그 고통의 분량만큼 희망 또한 옹골지게 키우던 사람들 속에 저 또한 섞여 있었습니다.

전에 한 번 글에 쓴 적이 있지만 1968년 8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형을 선고받고 20년 20일을 복역한 후 1988년 8월, 올림픽 특사로 가석방된 제 선친의 가족 대표로 그때 대학교 3학년이었던 제가 민가협 회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대학시절 내내 꽁무니에 형사가 따라 다니는 데다 저의 동향에 대해 학과장에게는 보고까지 요청해 놓은 상태에서 데모라도 있는 날은 특별 감시에 들어가고 어떤 때는 집에까지 쫓아오니 저는 저대로 어둡고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런 날은 으레 어머니도 일하다 말고 불려와 담당 형사에게 문초를 당해야 했습니다. 몇 달 간격으로 정해진 날짜에 찾아오는 공안담당 형사에게 "그런 일 없습니다. 이제는 아무 연결도 없어요...,그러믄요..." 죄인 아닌 죄인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며 말끝을 흐리시던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아픈데 그런 날은 덤터기를 써야 하니 더 속이 상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시절이 보다 살벌했을 때는 동네 사람 눈이 무서워 6개월에 한 번씩 이사를 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전학도 '밥 먹듯' 해 제 작은 언니의 경우는 초등학교를 예닐곱 번이나 옮겨 다녔습니다. 집에 누가 오는 것을 어머니가 싫어하셨기 때문에 어릴 적 우리 형제들은 친구를 집에 데려온 적도 없었습니다.

양팔을 간격있게 벌려 우뚝 선 채 버스의 동그란 손잡이를 잡고 있는 사람을 보면 아버지 고문당하던 모습이 생각나 몸서리가 쳐지는데 그 상태로 하도 맞아서 눈알이 빠지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는 어머니 말씀도 새삼 떠오르고 혹독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이글이글 타고 있던 취조실 석탄 난로를 엉겁결에 껴안아 얼굴에 중화상을 입었다는 서준식 씨, 남편의 사형선고에 충격을 받아 아내가 미쳐버렸다는 이야기들도 거기서 들었습니다.

잔혹한 고문을 거친 장기수, 양심수의 가족들이라 불리던 사람들 가운데 저는 가장 어린 회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무슨 민가협의 ‘잔다르크’는 아니었고 그 무렵 유난히 지쳐 하시던 어머니께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드릴 길이 있는지, 그게 아니라면 아예 체념을 해야 하는 건지 답답한 마음에 자투리일망정 조금치라도 시국과 관련된 정보를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민가협에서는 아버지의 구명을 위해 당시 제1 야당 부총재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셨는데 그분은 제게 여성지 같은 데에 딸의 시각으로 수기를 쓰는 것이 ‘윗선’을 건드리는 가장 호소력있는 방법이라고 조심스레 제안하시며 하지만 가뜩이나 연좌제가 있는데 그런 글로 인해 이담에 혼인할 때 더 지장이 있을까 염려된다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때 수기를 쓰지 않아서 그랬는진 몰라도 멀쩡히,그것도 적령기에 저는 결혼을 했고 아버지와 같은 사건으로 복역 중이시던 신영복 선생의 글과 그림을 옥중 결혼 선물로 받아 지금까지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섯 살 때 시작된 아버지의 옥살이가 스물여섯 결혼하던 그 해에 끝이 났으니 돌이켜보면 참말로 ‘징한’ 세월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니 ‘어치케 살았을꺼나’ 하고 혀를 차며 동정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구름 속에 있으면 구름을 모르듯이 저희 가족들 또한 ‘보통 사람들’처럼 울고 웃으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다만 요즘처럼 아버지와 비슷한 일을 겪은 분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 그로 인해 그 가족들의 고통이 다시금 떠오를 때 묵은 상처가 들춰지며 한동안 울울한 심회에 젖게 된다는 점에서 안 겪어본 사람은 짐작할 수 없는 속내 하나를 더 가지고 있다고 할까요.

김근태 고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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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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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Kwon (98.XXX.XXX.166)
그런 일도 있었군요. 댓글 많이 달렸네요.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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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4 23: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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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현 (110.XXX.XXX.249)
그 어려운 시련 가운데에 신선생님 가족도 고난으로 일궈 낸 민주주의 빛을 발산하고 있군요.



아버님 같은 분들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한국 자유민주주의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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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4 13:5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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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길 (110.XXX.XXX.249)
한 가지 뜻을 가지고 사는 일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일 중의 하나다. 그 많은 여러가지 정체성 느끼기 중 으뜸에 들어간다. 자신이 한 행위마다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곧 지금의 행복을 확인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김근태 님도 신아연 부친도 신아연 님도 또한 우리 모두는 자신의 시간을 만지고 확인하면서 서로에게 웃었고 또 웃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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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4 13:5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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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경 (110.XXX.XXX.249)
글 잘 읽었습니다. 눈물이 나는군요. 어두운 시대를 지나면서 양심에 따라 정의를 갈구하던 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어야했습니다. 훌륭한 선친을 두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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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4 13:5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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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67)
지금 이나마 표현의 지유를 누리는 것도 아연님 가족이 대신 아팠던 고통의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탁 쳤더니 윽 하면서 쓰러졌다"던 어이없던 시절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준 시절이었다고 강변 하는 사람들은 오직 먹기위해 사는 사람들인 모양입니다. 생전 문안 전화도 없는 아들애가 - "엄마, 김근태 씨 돌아가셨어요- 하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저도 맘 아프고 어미도 맘 아플거라 생각한다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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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3 15: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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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110.XXX.XXX.249)
저는 그런 생각을 이따금 합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밖에 살 수 없었을까... 우리 나라 사람들, 참 불쌍하다...모두들 불쌍하다... 역사 소설 속에 내비치는 우리들의 가슴 아픈 모습들, 그 아픔을 딛고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인데 김윤옥님 말씀처럼 왜 우리는 오직 먹는 것, 입는 것, 사치하는 것, 즉 돈에만 목숨을 걸게 되었을까, 그것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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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3 18:5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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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opco (116.XXX.XXX.171)
아무리 "구름속에 있으면 구름을 모른다"고 해도 그 구름에 온 몸과 정신이 적셔지는데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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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라도 정의가 세상을 지배해야 되는데 아직도 우리는 이러고 있으니
금년에 서울시장 선거 같은 무혈 시민 혁명이 지속되어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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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3 11: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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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110.XXX.XXX.249)
네, 맞습니다. 리트머스 용지처럼 제 삶, 저희 가족의 삶은 송두리째 다른 색깔로 변해 버리고, 그래서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세상을 살 수 밖에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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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3 19: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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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110.XXX.XXX.249)
나라 사랑, 나라 걱정이 각별하신 인내천님.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좋은 세상이 아닙니까. 앞으로 더 좋은 세상이 오겠지요. 아니, 와야 하지요. 이 땅에 태어난 죄로 다른 나라 사람들 겪지 않는 일, 처절한 민족적 비극을 겪으며 지금 이만큼 우리는 왔습니다.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개인이든 사회든 국가든 반드시 희망과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생명을 받아 이승으로 온 이유일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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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3 19: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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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 (110.XXX.XXX.249)
신아연님의 칼럼

참으로 가슴아픈 이야기입니다



압축성장과 압축민주화의 그늘에서 구겨진 삶들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밝게 글을 써주셔서 감사했고요

늘 살아있는 경험들을 문장으로 옮겨 써주셔서 잘 읽고 있습니다



모두가 져야할 고통을 대표로 부친께서 지셨다고 생각합니다



더 용기를 내셔서 다른이들보다 많이 보듬고 생각하며 지내셔야

그 가치를 져버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힘내십시요



김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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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2 14: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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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식 (110.XXX.XXX.249)
세상에! 이런 아픔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뭐라고 말씀을 드린들 위로가 되겠습니까만, 어쩌면 그런 내심의 상처가 혹 먼 그곳까지 이민을 훌쩍 떠나게 하였는지 모르겠군요.무엇보다도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에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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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2 12: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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