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되새긴 겸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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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되새긴 겸허

이성낙

2012년 02월 09일 (목) 00:38:28

얼마 전 한국여자의사회(회장 박경아 교수)가 주관하는 ‘나보타스 해상빈민촌 의료봉사단’의 단원으로 참여해 필리핀에 다녀왔습니다. 규모 면에서 결코 작지 않은 34명으로 구성된 의료봉사단은 열악한 진료 환경에서도 우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 찾아온 수많은 환자를 단원 모두가 몸과 마음을 다해 성심껏 진료를 했습니다. 우리 단원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실로 조용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필리핀, 그리고 마닐라는 더 이상 우리에게 먼 나라, 생소한 곳이 아닐뿐더러 친밀감을 주는 이웃 나라, 가깝게 느껴지는 도시입니다. 그러나 그곳을 방문할 때면 필리핀의 어제와 오늘 모습이 혼란스럽게 겹쳐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1950~1960년대 필리핀은 우리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잘사는 나라였고, 정치적으로도 모범 민주국가였다는 것을 떠올리면 말입니다.

우리가 찾아간 나보타스(Navotas)는 필리핀 수도 마닐라 시에 속하는 16개 도시 중 하나이며 그중 가장 생활환경이 열악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우리 앞에 놓인 나보타스의 주거 환경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수년 전 캄보디아에서 배를 타고 관광차 해상촌을 밖에서 둘러본 적이 있었습니다만, 실제로 맞닥뜨린 해상촌 안에 사는 주민들의 생활 여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열악했습니다. 그들의 해상촌과 서울 한복판 청계천에 즐비하게 서 있던 1950~1960년대 ‘누상 판잣집’이 자꾸 겹쳐 어른거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곳에서 생활하는 해상촌 주민들의 얼굴이 무척 밝았다는 점입니다. 특히 어린이들의 반짝이는 눈망울은 아름다워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임시 진료소에 찾아온 수많은 어린 환자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또 접수창구에 몰려든 환자와 동반자들 간에 서로 밀치거나 고성이 오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인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진료 과정에서 주사를 맞는 아이들 역시 심하게 울어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소아과 풍경과 대조되는 모습이었습니다. 더구나 진료를 받은 환자는 일어서면서 “Thank you, Doc! Thank you, Sir! God bless you!(의사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께 신의 축복을!)”라고 인사하는 걸 자주 들었습니다. 고마움을 표하는 모습에서 그네들의 소박한 아름다운 정서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곳 거리는 자동차로 혼잡하기도 하고 도로를 꽉 메운 차량에서 뿜어대는 매연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주 심했습니다. 신호등 없는 사거리에서 차량들 간의 뒤엉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GDP가 이 나라보다 몇 배 높다는 서울 한가운데 신호등 밑에서의 뒤엉킴을 아직도 지켜봐야 하는 우리는 얼마나 ‘선진 비슷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 물어보게 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본인은 이번 기회를 통해 그들에게 ‘주었다’기보다는 더 값진 것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잊힐 뻔한 겸허(謙虛)함을 다시 찾은 기쁨이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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