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서재경 경영에세이
     
오발탄
서재경 2007년 05월 30일 (수) 02:40:52
나이는 많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변화 중의 하나는 옛날 선생님들을 새록새록 떠올리는 것입니다. 소설가 이범선 선생님도 그런 경우입니다. 그분에게서 국문학개론을 배웠습니다. 이선생님이 대광고등학교에서 「오발탄」이라는 소설로 필화를 입어 학교를 그만 두고 여러 대학에 출강을 하던 때였습니다.

소설속의 주인공 송철호는 모든 비극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룬 인물입니다. 전쟁 통에 정신이 돌아버린 어머니는 계속해서 “가자, 가자”를 외칩니다. 상이군인으로 제대한 동생은 강도짓을 하다가 경찰에 체포됩니다. 여동생은 밤거리에서 몸을 팝니다. 병약한 아내는 치료시기를 놓쳐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이날 주인공은 오랫동안 앓던 이를 뽑습니다. 치과를 나와 택시에 오른 주인공은 병원으로 가야할지 경찰서로 가야할지, 집으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이 모습을 본 택시 운전사가 혀를 차며 오발탄 같은 손님이라고 내뱉습니다.

이선생님의 해고사유는 소설 말미의 ‘조물주의 오발탄’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한 신이 어떻게 오발탄을 쏘느냐는 것이 학교 측의 주장이었습니다. 요즈음이라면 이만한 일로 면직 되지는 않을 것 같으나 당시 세상은 그랬습니다.

저만 그런 것인지, 아니면 기억이라는 것이 본시 그러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분에게 국문학에 대해서 배웠던 내용은 하나도 남아 있지를 않고 희한하게도 제 기억의 창고에는 국문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법도(法度)’에 관한 이야기만 남아 있습니다. 기억의 조각을 주워 모으면 이런 내용이 됩니다.

「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인사를 한다. 대부분 식사는 하셨느냐, 혹은 어디 가시느냐, 그동안 안녕하셨냐고 묻는 것으로 인사를 삼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인사로 입에 올리지 않는 것도 있다. 가령 아침에 똥은 누었느냐, 요즈음 오줌은 잘 누느냐 등과 같은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인사를 하지 않는다. 배설도 인간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중요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화제로 삼지는 않는다. 그것이 법도다. 」

이선생님은 법도는 세세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법도는 그냥 지키는 것일 뿐,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것은 교양이 부족한 증표라고 했습니다.

요즈음 법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일들이 있습니다. 범여권의 대선후보로 이 사람 저 사람이 들먹여지면서 잠룡이라는 명칭이 몇 사람에게 붙어 다닙니다. 개중에는 과거 국회에서 법도를 넘는 언행을 일삼거나 방자하게 국회를 능멸한 사람들도 끼어 있습니다. 대의정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 국가에서 국회를 경시하는 사람들만큼은 대권을 넘보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국회가 민주주의의 근간이며 그것을 지키는 것이 법도니까요.

이런 법도를 깨는 사람들은 오발탄에 다름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노무현 정권에는 오발탄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각료가 국민의 대표를 능멸하는 것은, 아침인사로 배설의 안부를 묻는 것만큼이나 교양 없는 처세입니다. 국무위원이 국회에 나가 고압적 자세로 호통을 치거나 의원들을 훈계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납니다. 국회의원이 잘 나거나 옳아서가 아니라, 비록 불민해보여도 그들이 국민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국회의원의 방자한 행동을 무한정 허용하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국회의원의 잘못은 언론이 비판하고 지역 유권자들이 심판하면 됩니다. 그것이 선진사회의 법도입니다.

이범선선생님은 환갑을 지내고 얼마지 않아 타계하셨으니 요즈음 기준으로는 짧은 생을 사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제가 그분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제가 그분에게 배운 법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혹 어느 젊은이가 오늘 이 이야기를 기억의 창고 한 구석에 남겨두었다가 내 나이쯤 되어 또 다시 되풀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지나갑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0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