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테너 열전(2)

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홈 > 연재칼럼 | 김창식 에트바스

20세기 테너 열전(2)

김창식

2012년 02월 29일 (수) 01:39:10

20세기 후반 전성기를 구가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1935~2007), 플라시도 도밍고(Placido Domingo, 1941~ ), 호세 카레라스(Jose Carereras, 1946~ ) 이상 3테너의 서열은 어떻게 될까요? 순서를 따지는 것은 호사가들의 췌언(贅言)일 테지요. 당연히 개인의 취향과 선호에 따라 관점과 의견이 엇갈리겠지만, 파바로티, 도밍고, 카레라스의 순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점쳐봅니다.

목소리의 질(質)과 고음 구사 능력에서는 파바로티가 으뜸이죠. 리릭 테너의 전형으로 대중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고요. 오페라, 칸초네, 크로스오버 곡에 두루 능한 천재 형이며 정통 벨칸토 창법의 계승자라 할 만합니다. 반면 도밍고는 바리톤으로 시작해 테너로 전향한 노력 형 가수입니다. 거친 느낌의 음색과 박력은 드라마틱 테너로 손색이 없군요. 그의 목소리는 극적 전개가 있는 오페라에 잘 어울립니다. 배우처럼 잘 생긴 외모도 극중 역할에 승수효과를 발휘합니다. 병고를 이겨낸 친근한 이미지의 카레라스는 스핀토 계열의 음색인데, 섬세한 표현과 접근성은 두 사람에 앞선다고 할 수 있어요. 서정성은 도밍고보다 낫고 극적 표현은 파바로티보다 우위에 섭니다. 뒤집으면 서정성은 파바로티에, 드라마틱함은 도밍고에 뒤진다는 말도 되겠군요.

이들의 선배 격인 원조 3테너가 있습니다. 마리오 델 모나코(Mario del Monaco, 1915~1982), 프랑코 코렐리(Franco Correlli, 1921~2003), 주세페 디 스테파노(Giuseppe Di Stefano, 1921~2008)가 그들입니다. 마리오 델 모나코는 헬덴 테너(장중하고 깊은 질감을 주는 목소리)의 대표주자입니다. 음영 짙은 얼굴로 구약성서의 인물이 현신한 느낌을 줍니다. 우직한 멜로키(후두를 뒤로 젖히고 횡격막을 사용하는 발성) 창법을 구사하여 벨칸토 발성에 익숙한 청중들에게 충격을 안겼습니다. 혹자는 과장이 심하고 발음이 분명치 않다며 폄하하기도 하나 금세에 보기 드문 야성의 소리로 범종(梵鐘) 같은 울림을 전해주었지요. 레온카발로의 베르시모 오페라(이태리 하드코어 사실주의 오페라) <팔리아치> 중 '의상을 입어라'는 그의 굉량(轟量)한 목소리가 아니면 결코 참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성자(聖者) 마리오 델 모나코와 자주 비교되는 슈퍼스타 프랑코 코렐리는 배우 록 허드슨을 방불케 하는 수려한 미남이며, 역시 대표적인 헬덴 테너 입니다. 마리오 델 모나코가 강성일변도의 지축을 흔드는 타입이라면, 열정적이면서도 새턴처럼 질이 좋은 음성의 코렐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때로 델 모나코를 넘어서는 격정적인 표현을 구사했습니다. 기차 화통처럼 굵고 하늘을 찌를 듯 강력한 에너지가 넘치는 목소리로 드라마틱한 오페라뿐만 아니라 나폴리 민요에도 두루 능해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그가 부른 <토스카> 중 '별은 빛나건만'은 인구에 회자되는 명반이며, '불 꺼진 창', '너는 왜 울지 않고'도 절창 중의 절창입니다. 목소리의 결이 비슷한 근육질이지만 마리오 델 모나코의 이미지는 아놀드 슈왈체네거, 프랑코 코렐리는 실베스타 스탤론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세페 디 스테파노는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등장 전까지 20세기를 대표한 최고의 리릭 테너였습니다. 음색은 릴리꼬 레지에로와 스핀토를 겸했으며, 화려한 고음과 감미로운 중저음을 구사했죠. 평생 친구이자 소프라노 서열 1위인 마리아 칼라스와의 파트너십으로도 유명합니다. 프랑코 코렐리는 레나타 테발디와 짝을 이루었고, 스테파노는 마리아 칼라스와 한 팀이었으니 그들 드림팀 간의 경연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스테파노는 낭만적인 오페라의 주역으로 시작하여 점차 깊고 웅장한 오페라로 옮겨 갔는데, <라 보엠> 중 '그대의 찬 손'은 일품 레퍼토리입니다. 단정한 용모, 감미로운 음색을 소유한 데다 완벽한 발음을 구사하여 특히 나폴리 민요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일궈냈습니다.

이들 3테너와 한 세대 전 선배들이 가상대결을 벌이는 일은 흥미 있는 착상이 될 법합니다. 영화배우를 들어 비유하자면 한 발 물러선 거장들인 더스틴 호프만, 잭 니콜슨, 로버트 드 니로 대(對‧VS) 당대 최고 스타인 조니 뎁, 브래드 피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간의 있을 법하지 않은 대결입니다. 어렵사리 설득해 파바로티와 스테파노, 도밍고와 델 모나코, 카레라스와 코렐리의 매치 업을 성사시켜 보도록 하죠.

미성의 소유자들인 파바로티와 스테파노의 비교는 곤혹스럽습니다. 목소리의 윤기, 고음 구사에서 근소한 점수 차이로 파바로티의 손을 들어줍니다. 이 대결은 두고두고 논란의 소지를 남길 수도 있겠죠. 도밍고와 델 모나코는 두 사람 모두 바리톤에서 출발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같은 드라마틱 테너로서 도밍고가 더 정제되어 있지만, 가슴을 진탕하고 기혈을 들끓게 하는 델 모나코의 우위를 점치고 싶군요. 남은 사람들끼리인 카레라스와 코렐리는 체급(스타일, 창법, 레퍼토리)이 다르지만 어쩔 수 없이 맞서게 된 경우인데, 부드러우면서도 천지사방에 꽉 찬 듯한 음성의 코렐리에게 더 마음이 기우는군요. 이 글을 쓰는 지금 코렐리의 '페데리코의 탄식' 을 듣고 싶은데….

그밖에도 거론할 만한 스타들이 많습니다. 베니아미노 질리의 뒤를 잇는 처연한 리릭 테너 페루치오 탈리아비니, 한때 폭죽 같은 인기를 누렸던 마리오 란차, '인도의 노래'로 유명한 왕년의 명 테너 티토 스키파,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격찬한 전설적인 테너 잔 피어스, 600회 이상의 뉴욕 메트로폴리탄 공연 기록을 자랑하는 리차드 터커, 독일 출신으로 요절하여 뜻을 펴지 못한 미성(美聲)의 프리츠 분더리히….

역사의 문에서 전설의 세계로 사라져 간 스타들. 우리를 견인하던 그 '소리의 영웅'들은 다들 어디로 갔는지? 진솔한 감동이 없는 시대, 감각과 형상이 판치는 요즈음, 정통 성악곡을 들으며 느꼈던 전율과 몰입, 몰아의 경지가 새삼 그립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