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낙 이런생각]이 새로 연재됩니다
가천대 명예총장인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이성낙씨가 4월 18일부터 새로운 필진으로 참여합니다. 피부의학 권위자인 이 총장은 앞으로 의학과 교육에 관해 주로 집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잊지 않고 연구실로 집으로 찾아오는 제자들이 있는가 하면, 아름다운 마음을 담은 글이나 화분을 보내오는 제자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저 또한 옛 스승 몇 분의 기억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중에서도 저에게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깨우쳐주신 고교 시절 교장 선생님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얼마 전 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보수와 진보’라는 화두를 놓고 대화를 하다가 저에게 어느 쪽이냐는 물음에 별다른 생각 없이 “저는 보수입니다”라고 하자, 한 참석자가 “교수님이 어째서 보수이십니까, 진보시죠.”라고 하는 겁니다. 함께 자리한 다른 지인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요. 우리 사회를 보는 시각을 구분하는 ‘진보-보수 편 가르기 잣대’가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가 봅니다. 하기야 보수-진보, 우파-좌파, 그리고 좌파에서도 친북-종북으로 갈리는 데다, 진보도 정직한 진보와 거짓말쟁이 진보가 있으니 혼란스럽기도 하지요.

고교 동창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오간 적이 있습니다. 역시 저더러 진보라고 하기에 “종북은 아니지” 하고 웃어넘기면서, 우리 모두 중ㆍ고등학교를 함께 다니면서 진보적 교육을 받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더니 동의하기보다는 어리둥절해했습니다.

제가 중ㆍ고등학생 때, 즉 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란 시절’의 사회상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학교 교정에도 전상(戰傷)을 입고 제대한 후 복학한 ‘나이 든 상이용사’ 선배들도 보였고, 담배를 ‘당당히’ 피우던 모습도 보았습니다. 당시 사회상이 투영된 학교 분위기는 차분하기보다는 아주 무거운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학교 중ㆍ고등학생들은 머리를 빡빡 깎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중ㆍ고등학교 6년 동안 짧은 머리를 가진 적도 없습니다. 국내 중ㆍ고등학생들이 모두 예외 없이 삭발을 해야만 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학교만 교복 앞가슴에 이름표(명찰)를 달고 다니지 않았으며, 학생 신분으로 시내 영화관도 자유롭게 출입했습니다. 또 당시는 모든 고등학교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해 병무청에서 파견 나온 장교가 사열을 받고 평가를 하던 시절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최소한의 군사훈련만 받고, 훈련 시간에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곤 했습니다. 물론 다른 학교와 달리 시간 외 훈련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학생들이 군사훈련 평가 성적이 너무 나쁘면 어쩌나 걱정할 정도였는데, 당연히 시내 고등학교 중 최하위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런 특이한 현상 뒤에는 서원출(徐元出) 교장 선생님이라는 아주 ‘별난’ 교육자가 계셨습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학생이 왜 삭발을 해야 하나, 학생은 군경(軍警)도 아닌데 왜 이름표를 달아야 하나, 영화가 예술이라면서 왜 극장 출입을 막는가, 학생이 훗날 군에 입대해 배울 군사훈련을 왜 학교 교육과정에서 미리 받아야 하느냐는 등 곧은 교육 철학을 갖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더욱이 당시 시대성을 감안하면 우리 교장 선생님께서는 엄청난 진보적 성향을 가지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분은 사회가 당연시하는 규약적 개념을 재해석해 과감히 실천으로 옮긴 용기 있는 교육자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보적 교육을 받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제 삶의 원칙에 대한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1993년 신생 아주의과대학 초대 학장 시절의 일입니다. 의과대학 졸업반 학생들이 의사국가시험(이하 국시ㆍ國試)을 준비하는데 학생 대표들이 찾아왔습니다. 국시 준비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공부할 장소를 대학에서 제공해 주길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합숙 장소를 마련해 달라는 것입니다. 많지도 않은 17명이 필요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특히 신생 의과대학의 첫 졸업생들이 처음 치르는 국시인 만큼 그 결과가 적지 않은 사회적 파급 효과가 있고, 국내 대부분의 의대 졸업반 학생들의 다양한 형태의 ‘합숙’은 상례화된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은 지금 어린 학생도 아닌 데다 무슨 운동선수처럼 웬 ‘합동 합숙 훈련’입니까” 하며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당시 당혹감과 원망이 뒤섞인 그들의 얼굴 표정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만일 성적이 나빠 낙방생이라도 나오면 학장 사표는 물론 학부모들의 원성을 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국시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 몇 달간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다행히 우리 학교 첫 졸업생들은 100% 국시 합격이라는 놀라운 쾌거를 이룩해냈을 뿐만 아니라, 국내 의대 중 아주 우수한 시험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이 같은 저의 단호함이 어디서 나왔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래전 고교 졸업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는 졸업반은 물론 고2가 되면서 문과반과 이과반으로 반을 편성했습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졸업반 대표 몇 명이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우리도 문과반과 이과반으로 편성해 달라는 말씀을 드렸지요. 그런데 교장 선생님의 단호한 한마디, “우리학교는 대학 입시 준비 학원이 아니다”라는 일갈(一喝)에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당시 우리의 심정이 바로 의대 졸업반 학생들의 심정과 다를 바 없었겠지요.

근래 혼란에 빠진 우리 사회를 지켜보면서 크고 작은 사회 원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낍니다. 그래서 오래전 제 마음 깊숙한 곳에 ‘원칙의 씨앗, 진보의 씨앗’을 심어주신 서원출 교장 선생님을 더욱 기리며,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항상 생각이 나곤 합니다. 저는 언행은 보수적이면서도 생각은 진보적으로 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점 때문에 주위 분들이 저를 놓고 진보-보수 사이에서 헷갈려하시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