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은 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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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은 빚이다

김홍묵

2012년 04월 19일 (목) 00:25:01

축제는 끝났다. 쇼도 끝났다.
지난 주 남과 북에서 이틀 간격으로 벌어진 경국(傾國)의 대사는 모두 예측을 벗어난 결과로 막을 내렸습니다. 남한의 총선은 당초 예상을 뒤엎은 여당의 승리로 결판이 났고, 북한의 위성발사체 장거리 로켓은 공중폭발로 남가일몽이 되었습니다.

더욱 험난한 앞날이 예고됩니다. 가까스로 과반 문턱을 넘은 여당은 승리의 축배도 들지 않고 국정 다잡기 잰걸음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자만’으로 패배한 야당은 지도부 사퇴와 당권경쟁으로 시끄럽습니다. 선거 뒷날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필두로 한 승자팀은 국립현충원 분향소에, 한명숙 대표 등의 패자팀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소에, 문재인 당선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소에 각각 참배하는 광경을 보면서 더 암담한 내일이 떠올랐습니다.

3대에 걸쳐 염원했던 ‘강성대국’의 심벌 ‘은하3호’는 발사 135초 만에 20여 개로 산산조각나 서해에 수장되었습니다. 제작과 발사 비용이 자그마치 1조 원. 북한 주민의 2년 치 식량 부족분 값에 이른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탄생 100주년을 이틀 앞두고 벌인 쇼가 실패했는데도 손자 김정은은 같은 날 김일성ㆍ김정일 동상을 제막하고 군과 당권을 한 손에 잡았습니다. 내부의 권력 암투가 시작되는 조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과적으로 남한의 총선은 축제가 되지 못했고, 북한의 로켓 발사는 실패한 쇼로 끝났습니다. 승패와 상관없이 총선은 민심을 갈갈이 찢어놓고 심성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판도라 상자를 열어 놓은 것처럼. 국제 무대에 당당하게 진입하려 했던 김정은이 국제적 고립과 내분으로 고군분투하는 와중에 북한 인민은 이밥 고깃국과 더욱 멀어지는 것은 아닐지. 변덕 날씨처럼 봄이 봄 같지 않습니다.

다만 이번 선거에서 국민이 어떤 선택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반추할 대목이 있습니다. 비록 동서로 갈라지긴 했지만 유권자들은 심판보다 안정을, 꼼수보다 정도를, 막말보다 참말을 택했습니다. 선거철이면 으레 이합집산하여 ‘닥치고’ 비판하면서 쏟아내는 신기루도 마른 목을 적셔 주지 못했습니다. 어느 쪽, 누구를 더 믿을 수 있는지를 심판했습니다.

정책은 없고 정쟁만 있는, 대안은 없고 공약만 있는, 말만 무성하고 현실성이 없는 정치판에 대한 경고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긴 쪽에게는 민심을 다독이고 국민의 행복지수를 높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워 주었습니다. 진 쪽에게는 더욱 진정성을 가지라는 주문을 했습니다. 운동 경기의 코치 격인 선거 멘토들에게도 크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신뢰는 약속을 지켜야 싹이 트고 자랍니다. 남녀 간, 친구 간, 생산자와 소비자 간, 공복과 주민 간, 갑과 을 간의 사람 사는 사회면 어디든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하물며 국정을 주도하고 국운을 가름하는 정치와 선거에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척도는 당연히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우선순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목지신(徙木之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국시대 진(秦) 효공(孝公, BC 361~338)에게 발탁된 공손앙(公孫鞅)의 처세에서 생겨난 성어입니다. 왕의 법제개편 명령을 받은 앙은 오가작통(五家作統)ㆍ연좌법(連坐法)과 유사한 제도로 범죄자를 고발하게 하고, 두 아들을 분가시키지 않은 자에게는 세금을 배로 올리고, 종실(宗室)도 군공(軍功)이 없으면 족보에서 없애고, 공이 없는 부자는 영화롭게 살지 못하게 하는 등 엄격한 법령을 제정했습니다.

그는 이 법을 공표하기 전에 수도(首都) 남문 앞에 세 길이나 되는 나무를 세워 놓고 이를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 10금(金)의 포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손 대는 사람이 없자 50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어느 백성이 나무를 옮겨 놓았습니다. 앙은 즉석에서 50금을 주었습니다. 약속을 실천한다는 것을 보여 준 뒤에야 비로소 법령을 공표했습니다.

태자(太子)도 공경도 예외가 없는 이 법을 시행한 지 10년 만에 백성들은 길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가지 않고, 산에 도둑이 없어졌으며, 나라는 물산이 풍족해지고, 부국강병을 이룩했습니다. 앙은 약속을 이행하고 백성은 그를 믿고 따르게 한 사목지신은 중국 역대 정치의 기본 전략으로 자리를 굳혀 왔습니다.

앙은 법제 개편 뿐만 아니라 전제(田制)를 정비하고 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워 상(商) 땅을 다스리는 상군(商君)이 되었습니다. 상앙(商鞅)은 한비자(韓非子)ㆍ이사(李斯)와 함께 중국의 대표적 법가(法家)로 꼽힙니다. 법을 만들고, 엄격하게 시행하여 국부와 국위를 떨치게 한 표상의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비참했습니다. 상군의 지위를 얻자 자신의 치세와 교화(敎化)정책을 자랑하며 호가호위를 일삼았습니다. 그로부터 피해를 입은 종실ㆍ귀족들의 원망이 쌓여 불과 다섯 달 만에 역모로 몰렸습니다. 위(魏)로 도망간 상앙은 도로 진나라로 송환돼 자신이 만든 가장 잔인한 형벌인 거열형(車裂刑)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일가도 멸족당했습니다. 자존자만(自尊自慢)의 부메랑입니다.

믿음은 인간이 가진 가장 향기로운 품성의 하나입니다. 신사(信士)는 심념이 굳고 신실한 신붕(信朋)을 골라 사귑니다. 신조가 굳고 신의 있는 사람은 신임을 받고, 신용있고 신망받는 사람은 신봉자를 거느립니다. 공자가 식(食)과 병(兵)을 버리더라도 신(信)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나, 미생지신(尾生之信: 미생이 애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 홍수가 나서 익사했다는 고사)이 회자되는 것은 믿음의 미덕 때문입니다.

신뢰의 밑거름이 되는 약속. 그 약속은 꼭 지켜야만 빛이 납니다. 괴테는 “입법가든 혁명가든, 평등과 자유 두 가지를 약속하는 자는 공상가 아니면 사기꾼”이라고 약속의 남발을 경계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약속을 지키는 최상의 방법은 결코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약속 이행의 어려움을 강조했습니다.
‘약속은 곧 빚’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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