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박상도 맞장구
     
김구라의 복숭아
박상도 2012년 04월 21일 (토) 08:46:00
한비자(韓非子)의 세난편(說難篇)에 여도담군(餘桃啗君)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옵니다. 임금에게 먹다 남은 복숭아를 먹였다는 뜻인데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위(衛)나라에 미자하(彌子瑕)라는 미소년이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모친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에 몰래 임금의 수레를 훔쳐 타고 나갔는데 그 나라에는 왕의 허가 없이 왕의 수레를 타면 두 다리가 잘리는 벌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위왕은 오히려 효성이 지극하다며 미자하에게 상을 내려 칭찬했다고 합니다. 또 하루는 미자하가 복숭아를 먹다가 맛이 너무 좋다며 반쯤 먹다 남은 복숭아를 왕에게 바쳤다고 합니다. 왕은 기뻐하며 “그 맛있는 것을 다 먹지도 않고 과인에게 주다니, 진정 너의 사랑을 알겠도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미자하에 대한 왕의 사랑이 식자 어느 날 사소한 일로 미자하를 꾸짖으며 “이놈은 본래 성품이 좋지 못한 놈이다. 예전에 나를 속이고 수레를 탔으며, 나에게 먹다 남은 복숭아를 주었도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과거에는 총애를 받던 일이 나중에는 죄의 근원이 된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로 애정과 증오의 변화가 심함을 표현할 때 이 ‘여도담군’이라는 사자성어를 씁니다.

이 여도담군과 딱 맞아 떨어지는 일이 최근에 있었습니다. 거침없는 입담으로 메인 MC대열에 합류한 김구라 씨가 십여 년 전 인터넷 방송에서 했던 말이 문제가 되면서 모든 방송을 접고 자숙의 시간을 갖겠다고 합니다. 사건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김구라 씨는 2002년 딴지일보의 인터넷 방송 '시사대담'에 출연했을 당시에, "80여명의 창녀들이 경찰에 인권 관련 고소를 하고, 전세버스를 나눠 타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하러 갔다”며 “창녀들이 전세버스에 나눠 탄 것은 옛날 정신대 이후 최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한번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고사성어가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요? 사실 미자하는 변한 것이 없습니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임금의 수레를 훔쳐 타는 것과 자신이 먹던 복숭아를 지존의 입에 넣어주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하는 당돌한 사람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임금은 그를 벌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고 임금의 마음이 그에게서 멀어지자 과거의 잘못까지 들추어서 벌을 주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변한 것은 임금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임금은 지존이기 때문에 당신의 마음이 변했다고 탓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임금이 누렸던 지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대중입니다.

김구라(본명 김현동) 씨가 긴 무명 생활을 딛고 일어섰던 이유가 바로 그 ‘막말’ 덕택이었습니다. 그가 예명을 ‘구라’라고 한 것만 봐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구라’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거짓말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TV에서 “김구라 씨”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속어를 사람 이름에 썼던 경우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중은 용납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속 시원하게 할 말을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좋은 말로 추켜세우기만 하던 연예인들만 보다가 연기 못하는 배우, 노래 못하는 가수에게 독설을 날리는 그를 보면서 통쾌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김구라’라고 불렀다는 것은 그를 속칭 ‘구라꾼’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에게서 수준 높은 방송을 기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 그가 무명시절에 인터넷 방송에서 쏟아 놓은 수많은 말들을 지금 다시 듣는다면 문제 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아무런 제재가 없다가 이제 새롭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김구라는 변한 것이 없는데 대중의 마음이 변한 겁니다. 물론 종군 위안부와 집창촌 여성을 동일 선상에 놓고 발언을 한 듯한 그의 언행은 미자하가 임금을 능멸한 것에 버금가는 잘못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당시에 그를 벌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가 그 당시엔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탓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막말 방송을 방치한 책임은 무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10년 후에 끄집어 낼 수 있는 잘못을 그 당시에 덮고 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미자하가 애초에 잘못을 했을 때 임금에게 충언을 하여 미자하에게 작은 벌이라도 내리게 했다면 후세 사람들이 위나라 왕을 변덕이 심한 군주로 조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임금이 총애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감히 나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언관이 제 소임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10년 전에 질타를 했어야 하는 막말 방송을 질릴 때까지 듣고 나서 이제 와서 개념 없다고 단죄하는 지금의 모습 역시 참으로 당혹스럽습니다. 우리 모두 조롱을 당하는 느낌입니다.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중용의 도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막말과 파격과 호통과 엽기로 주목을 끈 사람들이 TV에서 여전히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극단의 선택만이 생존의 필수조건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매스컴은 그 속성상 늘 ‘새로운 것’을 찾습니다. 하루 하루 item 즉, ‘이야깃거리’를 찾느라 전쟁을 치릅니다. 위험한 줄타기가 매일 이어집니다. 그 중에서 대중에게 선택 받는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당위성’을 인정받습니다. 왜냐하면 ‘잘 팔리기’ 때문입니다. 혼탁한 세상입니다. 바른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1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신아연 (110.XXX.XXX.249)
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회가 너무 혼탁합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반성없이 부나방처럼 헛되게 몰려다니고 있습니다. 자신이 가장 '대중적'인 사람이면서, '대중'을 탓하는 세상입니다.
답변달기
2012-04-22 09:35:50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