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와 백경(白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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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와 백경(白鯨)

김창식

2012년 04월 25일 (수) 00:51:08

제 48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이 26일 열립니다. <범죄와의 전쟁> 등 다섯 작품이 영화부문 작품상 최종 후보에 올라 경쟁을 펼칩니다. 후보작들의 면면을 살펴보며, 최근 2~3년 사이 개봉한 영화 중 강우석 감독의 <이끼‧2010>만큼 '잘 만든' 영화가 없었음을 새삼 느낍니다. 주제에 대한 천착, 배우들의 치열한 연기, 정교한 미장센과 디테일 면에서 그렇습니다. 인간의 내면에 드리운 악의 뿌리를 들추고 인간 구원의 당위성에 대한 묵직한 질문도 던져주었죠.

윤태영 원작 웹툰을 영화화한 <이끼>를 보며 허만 멜빌(Herman Melville‧1819~1891)의 소설을 토대로 한 존 휴스턴 감독의 <백경(白鯨)‧1956>을 떠올렸습니다. 시대적 배경도 상이하고 소재도 달라 전혀 어울릴 법하지 않은 두 텍스트는 캐릭터의 특성과 인물 간의 갈등구조 맥락에서 서로 닮았습니다. <이끼>에 나오는 천용덕 이장(정재영)과 전도사 유목형(허준호)의 관계는 흰고래 모비딕(Moby Dick)과 에이허브 선장(그레고리 펙)을 생각나게 합니다.

오래 된 흑백영화 <백경>에서 고래에 다리를 잃은 포경선 피쿼드 호의 에이허브 선장은 복수의 일념으로 자신과 선원을 독려하며 3대양을 항해합니다. 집요한 추적 끝에 고래를 발견하고 사흘간에 걸쳐 처절한 사투를 벌이지만 함께 바다 속으로 사라지고, 내레이터인 이즈멀만이 유일한 생존자로 살아남아 회상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끼>는 유목형의 아들 유해국(박해일)이 아버지의 죽음을 접하고 외진 마을을 찾아오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장례를 마친 해국에게 사람들은 적의를 드러내며 마을을 떠나라고 강요합니다. 의혹을 품은 해국이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한 비밀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헌납받은 재산이 한순간에 천용덕 이장에게 양도된 것을 알게 됩니다. 나아가 기도원 수용자들의 떼죽음과 아버지, 천 이장의 관계가 얽혀 있는 것을 눈치 챈 해국에게 죽음의 위협이 조여옵니다.

<백경>은 구성의 다면성, 장대한 스케일과 서사의 상징성으로 여러 다른 해석이 가능한 수수께끼의 작품이지요. 일반적으로 거대한 향유고래인 배경은 악의 표징이자 질서의 파괴자를 상징합니다. 한편 고래에 맞서 싸우는 심정적 주인공인 에이허브 선장 또한 신화 속 전통적인 영웅상이 아닙니다. 악의 권화(權化)에 맞선 숭고한 인간정신이거나 퓨리턴적인 절제와 규율의 상징이 아니라 편집광적인 집념에 함몰된 그로테스크한 인물로 그려진 때문이죠.

<이끼>에서 천 이장은 악의 화신으로 묘사됩니다. 시골 경찰이었던 그는 유목형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영지(유선)를 성적으로 유린하며 부랑자 패거리를 포섭, 마을 사람들을 협박해 토지를 갈취합니다. 유목형과 함께 공동체 마을의 대주주이며 기도원의 집단 학살과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한편 유목형은 영혼의 구원을 설파하면서 주민의 땅을 교묘히 헌납 받고 조폭도 감탄하는 결기와 깡다구를 과시하는 불가사의한 인물이지요.

흰고래 모비딕과 에이허브의 대결은 선과 악, 문명과 야만, 영혼과 파괴 본능 등 상식적인 이원론으로 환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질이 비슷한 요소 간 대립으로 보는 편이 설득력이 있지요. 대치 관계인 백경과 에이허브는 서로의 파멸을 통해 연민과 공존을 찾은 것일 수 있으며, <이끼>에서의 천용덕과 유목형의 관계도 같은 맥락으로 파악됩니다. <백경>에서 고래와 선장은 함께 파멸하며 천 이장과 유 전도사의 운명도 같은 궤(軌)에 놓입니다.

<이끼>의 마지막 부분. 효과음이 소거돼 먹먹한 울림을 주는 몇 장면은 감독이 준비한 회심의 노림수입니다. 일어날 채비를 하던 관객은 돌연한 사태의 변화에 숨이 멎을 듯합니다. 천 이장의 자살로 상황이 일단락된 마을로 유해국이 찾아오지요. 마을은 새롭게 단장되고 새 건물이 들어서며 아이들은 밝은 미래를 보여주듯 놀이터에서 뛰놉니다. 과거의 질서가 퇴장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을 뜻하는 '건설 현장'은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상징적 장치(Convention)이지요.

전통적 영웅서사와는 괴리가 있는 흰고래와 선장의 대결은 선악의 경계가 흐트러져 있어 누가 본질적이고 거대한 악이며 누가 의존적이며 기생하는 악인지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이끼>에서도 숨겨진 서사는 유목형에게 더 혐의를 두는 듯하지만 확실치 않습니다. 그런데 백경에서 간과한 것이 있었어요. 모든 것이 멸(滅)하고 난 뒤에도 초월적이고 여여(如如)한 존재인 '바다'가 그것이에요. 마찬가지로 이끼에서도 놓친 것이 있었지요. '바다'에 해당하는 제 3의 존재.

다시 <이끼>의 마지막 시퀀스를 떠올려 봅니다. 천 이장의 거처였던 마을의 가장 높은 망루(望樓‧panoticon)에서 새로운 영주가 돼 내려다보는 영지의 미묘한 눈길과 유해국의 눈길이 마주칩니다. 흐릿한 미소를 띤 여자는 웃는 듯 우는 듯 말이 없군요. 비밀을 감춘 자는 원래 말을 아끼는 법이죠. 순간 해국의 귓속에 전화상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주던 여자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영지였군요! 그녀가 '제 3의 인물'이었어요. 영지가 전지적인 시점에서 이 모든 것을 기획하고 파멸을 합리화한 '절대악의 현신'이었다니.

김윤옥 (110.XXX.XXX.229)

최근에 영화를 볼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꼭 봐야지, 벼르기만 했던 것들도 다 지나갔습니다.
함께 글공부 하는 사람중에 SG워너비 메인 보컬 김진호 엄마가 무료 영화 관람권으로 자주 초대해 주었는데 내가 손녀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니까, 더 이상 권하지 않게 되었지요.
최근엔 초등동창이랑 늦은 저녁시간에 다큐영화 <말하는 건축가>를 본 것이 유일한 영화 감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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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1 23: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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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do (114.XXX.XXX.34)

<말하는 건축가> 좋은 영화라고 들었습니다만, 김윤옥 님.
SG워너비가 록 버전으로 리메이크해 부른 '내 마음의 보석상자'도 한번 감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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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2 15: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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