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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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또 간다

임철순

2012년 05월 04일 (금) 00:48:27

토요일이었던 4월 21일, 고교ㆍ대학 동문들과 함께 청계산에 가기로 해 집을 나섰지만, 예보대로 비가 꽤 내렸습니다. 이 비 속에 나올 사람이 있을까 싶어 취소하려다가 모처럼 기획한 행사이니 밥(술)이나 먹고 헤어지자고 강행했는데, 약속장소에 나타난 사람은 나까지 모두 여덟 명이었습니다. 10시 무렵 지하철 서울대공원 역은 등산객들로 꽉 찼습니다. 이 비 속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 갈팡질팡 웅성웅성하기는 모두가 다 같았습니다.

우리는 산에 올라가는 대신 단체로 할 수 있는 일을 논의한 끝에 서울대공원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등산배낭을 메고 우산을 받은 채 비 속에 동물 식물 곤충들을 만나고 다닌 2시간여 동안은 뜻밖에 재미있고 보람이 있었습니다. 20여 년 전 아이들이 어릴 때 가보았던 서울대공원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모든 게 잘 세심하게 정리ㆍ배치돼 있었습니다. 저장된 자연, 갈무리된 자연이지만 어른들에게도 동물원 구경은 여전히 즐거운 일입니다.

하지만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비와 바람에 마구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한 주일 전만 해도 꽃이 다 피지 않아 대체 봄이 언제나 오나 했는데, 1주일 동안 애써서 온 힘을 다해 핀 꽃들이 무참하게 지고 있었습니다. “어젯밤 비에 꽃 피더니 오늘 아침 바람에 꽃이 지누나. 가련하여라, 한갓 봄날의 일이 비와 바람 속에 오가는구나”(花開昨夜雨花落今朝風可憐一春事往來風雨中)라는 조선 중기의 문인 송한필(宋翰弼)의 우음(偶吟)이 생각났습니다. 이 시에서 ‘可憐一春事往來風雨中’은 모를 말이 없는데도 우리말로 옮기기가 참 어렵습니다. 마음에 쏙 드는 번역을 아직 찾지 못해 이날도 비 속에 걸어 다니면서 어떻게 옮길까를 또 궁리했습니다.

두보(杜甫)의 시 ‘一片花飛減却春(일편화비감각춘)’도 우리말로 옮기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의 <曲江二首(곡강 2수)> 중 첫 시에 나오는 이 말은 ‘한 조각 꽃잎이 날려도 봄은 깎이는데’(또는 봄날이 저무는데, 또는 봄빛이 깎이는데)로 번역되나 봅니다. 그 다음 風飄萬點正愁人(풍표만점정수인)은 ‘바람에 흩날리는 만점 꽃잎에 정녕 시름에 잠긴다’ 이런 뜻인데, 가장 곡진하고 핍진한 번역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一片과 萬點의 대비와 점층이 이 시를 명편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나뭇잎이 떨어지는 걸 보고도 천하에 가을이 왔음을 안다지만(一葉知秋), 만점의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니 정녕 봄이 가는 것이겠지요.

올해 4월은 참 어지러웠습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사계절이 한 달 안에 다 나타나는 종잡을 수 없는 날씨였습니다. 정리하려던 겨울옷을 다시 꺼내 입어야 할 만큼 춥더니, 봄 코트를 사 입으려고 벼르던 여성이 어어 하는 사이에 여름이 돼 버렸다고 아쉬워할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사람은 날씨 예보에 맞춰 잘 살아가고 있지만, 저 여리고 어린 동ㆍ식물들은 이 봄을 대체 어떻게 지내고 있는 것인지, 이 봄을 봄이라고 할 수나 있는 것인지, 피었던 꽃은 다 어떻게 되는 것인지…그런 걱정을 사뭇 했습니다.

그런 걱정과 어울린다고 생각될 만큼 동물원에서 만난 동물들은 하나같이 추레하고 을씨년스러워 보였습니다. 부리를 다쳤는지 주둥이를 붕대로 감고 있는 검은 수리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비를 맞고 있었고, 라마는 무슨 회한과 반성거리가 그리도 많은지 비 속에 쭈그리고 앉아서 고개를 계속 주억거리고 있었습니다.

식물원 앞에 가보니 손으로 턱을 괸 사람의 흉상이 화단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모든 걸 생략하고 얼굴과 손만 묘사한 그 조각은 마치 스스로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비에 젖어 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을 들여다 보노라니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비를 맞고 있는 것들은 모두 다 엄숙해 보였습니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는데도 동물들이 그저 하염없이 비를 맞고 있는 건 정직하고 엄숙한 행위로 보였습니다. 그렇게 비를 맞는 것들은 모두 다 조금씩 외롭고 슬퍼 보였습니다

무엇인가 삶의 깨달음을 담은 말을 보태고 싶고 세상을 전혀 새롭게 보고 싶은 봄날이 이렇게 가고 있었습니다. 인류가 이 지구상에 나타나 기면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벌떡 일어섰을 때, 어린 아이가 벌벌벌 기다가 어느 날 갑자기 뒤뚱거리고 서서 까르르 웃는 그 빛나는 순간 이후, 이 세상에 봄이 있다는 걸 안 뒤부터, 그리고 꽃이 핀다는 걸 안 뒤부터 인간은 정말 무수히도 많이 봄을 말하고 노래했건만, 왜 아직도 이렇게 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더 있어야 하는 것일까?

봄은 누군가의 말대로 ‘보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말에서는 사물에 대한 인식의 진행보다는 이미 완성되고 마무리된 감각, 그 허망하고 덧없는 완료가 더 두드러져 보입니다. 봄에는 눈부시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의 몰락, 끝내 잃어버린 고향, 청춘과 어린 시절, 잠깐 머물다 사라지는 우리의 삶, 이런 것들을 꽃과 함께 보게 됩니다. 보는 것은 모든것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봄을 보면서 봄을 보냅니다. 봄날은 올해에도 그렇게 가고 있습니다.

2004년 봄 계간 <시인세계>가 시인 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봄날은 간다’(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가 꼽혔습니다. 거의 모든 연령층에서 이 노래가 1위였습니다. 수많은 가수들이 백설희의 노래 ‘봄날은 간다’를 자기 식으로 다시 불렀습니다. 연극과 영화로도 같은 제목의 작품이 나왔습니다.

‘봄날은 간다’라는 시도 참 많습니다. 봄날의 황홀과 허무, 탐미를 읽을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김종철의 ‘봄날은 간다’는 ‘꽃이 지고 있습니다/한 스무 해쯤 꽃진 자리에/그냥 살았으면 좋겠습니다/세상일 마음 같진 않지만/깨달음 없이 산다는 게/얼마나 축복 받은 일인가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상에 더 많은 천벌이 있어야겠다/봄날은 간다.’(고은) ‘해가 뜨면 같이 웃고 해가 지면 같이 울던 봄날은 간다/바람만 부는 봄날은 간다(중략) 당신은 남고 봄날은 간다/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이승훈). 이런 시도 있습니다.

‘연분홍 치마가 휘날리더라, 그런 늙은 유행가가 흥얼거려진다는 것,/내 생도 잔치의 파장처럼 시들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정일근의 시의 일부입니다. 그의 시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전략) 이제 그들은 이 별에 없다/벚나무 아래서 만났던 첫사랑 그 소녀도 없다/터질 것처럼 뛰는 가슴을 가졌던 열일곱 나도 없다//(중략)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우는/누구에게도 그런 알뜰한 맹세를 한 적은 없지만 봄날은 간다/시들시들 내 생의 봄날은 간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은 제목의 시를 쓰는 것은 원곡의 가사가 너무도 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봄이면 누구나 다 어쩔 수 없이 시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술자리에서 남들과 이야기할 때, 술을 마시고 혼자 걸어갈 때 홀연 새로운 말이 배어 나오거나 떠오릅니다. 그러나 술에서 깨고 보면 그 말들은 다 어디론지 사라져 생각나지 않고, 잊지 않으려고 휘갈겨 쓴 메모는 해독하기 어렵거나 읽어봤자 별 내용도 아닙니다. 아예 말이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꽃 지고 잎 나서 서러운 이 세상에 남들은 무엇이든 말을 하고 시를 써서 한 계절을 또 보내고 있는데, 나는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아 한마디 말도 보태지 못한 채 그저 남의 글이나 인용하면서 아아, 이렇게 다시 술에 취해 봄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봄날은 또 갑니다.

장기천 (211.XXX.XXX.129)

봄날은 간다 글을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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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7 18: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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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철 (121.XXX.XXX.16)

'술에서 깨고 보면 그 말들은 다 어디론지 사라져 생각나지 않고, 잊지 않으려고 휘갈겨 쓴 메모는 해독하기 어렵거나 읽어봤자 별 내용도 아닙니다'. 글 쓰는 사람도 이렇군요.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내게 위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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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6 08: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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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110.XXX.XXX.229)

봄날이 또 갑니다.
가장 명징한 울림으로 우리 곁을 한 번 더 지나가는 봄날에 ... 어쩌지 못하는 아쉬움만 남습니다.
지난 가을 단풍이 온통 붉던 때 더 이상 나들이가 어려워지신 교수님을 남양주 자택으로 찾아뵙던 날 새 봄, 벚꽃 필 때 다시 오겠노라 철석같이 약속해놓고 오다 가다 반복하는 올봄에 휘둘리다보니 벚꽃 한 번 못보고 여름을 맞았습니다.
어떤 말씀으로 변명해야하나 난감함 보다 쓸쓸하고 허무한 봄이 안겨준 이 비감을 그분도 함께 하실텐데 어떻게 수습해야하나,..... 초조함마저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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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6 00: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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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구 (121.XXX.XXX.16)

참, 절창입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임선생님의 글은 비수처럼, 명치 끝을 후비는 그런 싸~함이 있네요. 정 범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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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5 22:3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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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장춘 (121.XXX.XXX.16)

시와 유머와 술을 사랑하고 용열함을 미워하는 컬럼니스트의 매끄러운 글솜씨가 부러운 컬럼입니다.' 봄날은 가도 사람은 남는 ' 그리운 봄날,컬럼을 통해 잘 읽었습니다. 조금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 오는 늦 봄 초여름을 즐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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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5 06:3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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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태식 (211.XXX.XXX.129)

일찍이 가는 봄에 대한 아쉬움을 이렇게 담백하게, 그리고 해박하게 풀어놓은 글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글감이 교양과 지성 속에 자연스럽게 용해되어 높고도 정련된 비평정신으로 태어나는 글쓰기의 현묘한 경지를 맛보게 하고 있습니다. 언제 한 번 뵙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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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4 15:3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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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천 (211.XXX.XXX.129)

오랜만입니다. 아무런말이 생각나지않아 한마디 말도 보태지못한것은 그대의 내면속에 깔려있는 한이 있기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수와 같이 흐르는 세월의 아쉬움이 깊게배어있는 퍽 의미있는 글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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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4 15:3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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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호 (211.XXX.XXX.129)

담연 선생님,

저도 서귀포에서 꽃나무 보고 기르기도 하면서 4월을 보내는 것에 무척 마음이 쓰이었읍니다. 영문도 모르고 잔인한 4월을 이야기 하곤 하다가 여전히 시인이 왜 잔인하다고 한 지에 대한 의문을 완전히 풀지 못 한채이지만 화려한 4월을 지내오면서 아뭏든 잔임함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읍니다. 좋은 글 읽을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저는 한 시에는 완전 맹탕입니다 만 우리말만 가지고 보았을 때 (꽃이 피고지는) '한 봄의 일이 비와 바람 속에 오가는구나.' 로 하면 어떨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5월도 좋은 달이니 즐거운 시간 많이 보내시기 빕니다. 불어의 '행복(le bonheur)'이 '좋은 시간'임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읍니다. 서귀포에서 정 달 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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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4 12:4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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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국 (211.XXX.XXX.129)

지하철 안에서 아이폰으로 읽었습니다. 오늘 빌려쓰셨다는 시들보다 산생님의 글리 조는 훨씬 가슴에 더 와닿습니다. 어디쯤 와있는 꽃잎이신가요? 꽃으로 매달려 있나요, 떨어져 물 위로 흘러가고 있나요? 이미 저 바다로 흘러가 우리 기억 속에 희미하게 존재하는 선배들도 있지요. 물에 뜨서 흘러가며 바라보는 세상도 그리 나쁘진 않을 거 같습니다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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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4 12:4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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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원태 (211.XXX.XXX.129)

가는 봄날을 이렇게 보내시는 담연님의 글에 "공감"합니다. 언젠가 뾰죽이 고개를 내미는 신록이 너무 곱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네가 그러나, 나는 어떻겠냐"라시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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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4 12:4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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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환 (211.XXX.XXX.129)

봄날은간다ㅡ멋져요ㅡ잘계시죠?김이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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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4 12: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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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규 (211.XXX.XXX.129)

임철순 주필님의 글

반갑게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소개해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우석대 김두규 교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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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4 12:3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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