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설마 사회’가 부끄럽다

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홈 > 연재칼럼 | 이성낙 이런생각

우리의 ‘설마 사회’가 부끄럽다

이성낙

2012년 05월 09일 (수) 00:08:21

철들기 시작하면서 집안어른들한테 들은 ‘염치(廉恥)’라는 단어와 “설마가 사람 죽인다고 했다”라는 어구가 아마도 필자의 기억 속에는 가장 오래된 가훈과 같은 교시(敎示)로 자리 잡고 있는 듯싶습니다. 어린 시절 어른들한테 꾸중을 들을 때면 “염치를 모르면 안 된다”라는 말을 정확한 뜻도 모르면서 자주 듣곤 했는데, 세월이 지나고 사회인으로 성장하면서 염치라는 낱말이 가진 사회․교훈적 의미를 새삼 깨닫고 다시 음미하게 되었습니다. 또 “자고로 설마가 사람을 죽인다고 했다”며 요행일랑 바라지도 말라는 단호한 훈시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근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추한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참 염치도 없는 인물이 횡행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마 들통이야 나겠느냐’는 얄팍한 심보로 버티다가 고만 들통이 나는 ‘서 푼짜리 드라마’를 지켜보는 것도 이제는 역겨울 정도입니다.

미국 자동차 생산의 중심 도시에서 오랫동안 살다 귀국한 한 지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곳에서 살 때는 하루 일과를 총기 난사 사건 관련 소식과 더불어 시작했는데, 이곳 한국에선 부정부패 관련 소식이라고 독백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근래 들어 이 같은 사회 현상은 더욱 심해진 것 같습니다. 정경유착의 덫에 걸려 정치나 경제계 인사들이 줄줄이 검찰청으로 들어가며 보도진에 둘러싸여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일상화되어 버린 지 오래되었으며, 근래에는 교육계와 종교계, 나아가 KTX, 원자력발전소 공무원들의 납품 비리 연루까지 터져 나오니 참으로 민망하고 속상하다 못해 불안하기까지 한 심정입니다.

베이징의 한 미술 전시회(2005)에 갔을 때 우연히 국내에서 창작 예술 활동의 둥지를 튼 인도 태생의 설치작가 탈루(L.N.Tallur,1971~)의 작품 <철조망>이란 것을 본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 작품은 우리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철조망을 소재로 만든 평범하게 보이는 설치 작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단순한 작품을 대하는 순간, 쇠가시만큼이나 날카로운 무언의 외침으로 우리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인류가 오랜 옛날부터 버리지 못한 병폐인 마음의 ‘경계 긋기’를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어 적절한 매체를 찾다가 철조망을 선택했다”고 작가는 설명했습니다. 작가는 인간이 사는 사회 도처에 팽배해 있는 ‘경계선 긋기’를 아주 평범한 철조망을 이용해 회화적 언어로 꾸짖고 있었습니다. 인간 사회에 팽배한 위선을 감추듯 금색으로 채색한 철조망을 투명한 유리병에 소중한 것인 양 잘 포장했습니다. 이 같은 유리병 작품 100여 개를 선반 위에 강압적으로 줄 세운 것을 강조하듯 규격 있게 설치했습니다. 그는 세계 도처, 인간이 사는 공간 어디에나 편견과 오만의 편 가르기 상징인 ‘경계선 긋기’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당시의 느낌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깨우침의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설마…’ 하는 의식구조에 혹시 ‘철조망 보호 의식’이 더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철조망 울타리 안에서 끼리끼리 편들며 범행한 사실이라 들통 날 가능성도 그다지 높지 않을 거라는 착각은, ‘철조망은 외부로부터 오는 모든 성가신 접근을 막아주리라’는 보호 기능을 과신한 데서 나온 듯합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연쇄 부패 고리 현상을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 만연하는 혼탁함을 우리는,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 그저 속수무책(束手無策)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혼탁한 우리 사회가 마치 blackout이라도 곧 당할 것만 같습니다. 불현듯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6~1546) 선생님의 가르침이 생각납니다. 어느 날 대낮에 눈먼 장님이 마을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눈을 떠 밝은 세상을 보게 되자, 오히려 자기 집을 못 찾고 헤매는 모습을 지켜보던 화담 선생은 ‘그러하다면 다시 눈을 감고 가시게나’ 하니 장님이 예전처럼 눈을 감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무사히 귀가하더라”는 내용의 고사가 전해오듯 오늘날의 우리가 의지할 지팡이는 그러면 무엇일까 물어보게 됩니다.
조선 시대 선비 정신에 우리가 찾아야 하고 꼭 필요한 지침 코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조선 시대 문화유산인 초상화에 우리가 찾는 것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 조선 시대 초상화에는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 특히 중국이나 일본 초상 미술 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주 특유하고 유일Unique한 자랑스러운 문화 코드가 있습니다. 그것은 조선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털끝 한 올이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似便是他人)”라고 명시했듯이 조선 시대 초상화를 제작할 때면 “있는 그대로, 보는 그대로 정직하게 그려라”는 지침이 있었습니다. 이 정직하라는 메시지가 조선조 500년 넘게 변함없이 지켜온 우리의 문화전통입니다.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조선 왕국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입니다. 어진을 그리면서 글쎄 겁도 없이 태조의 이마에 작은 육종(肉腫Nevus)이라는 병변을 명확하게 그려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자랑스러운 정신적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하듯 우리 정신에는 사회적 정직함이 서려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의 방황 혼탁은 일시적인 것일 뿐 결코 우리 본연의 모습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래전 대만을 방문했을 때 한 초등학교 건물 벽면에 선명하게 쓰인 “애국(愛國) 애족(愛族) 염치(廉恥)”라는 글귀를 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가 무엇이 부끄러운 것인지도 알고, ‘설마 나야…’ 하는 요행의 탈에서도 하루빨리 벗어나 조선 초상화가 전하는 원래의 정직한 사회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