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보다 두려운 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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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보다 두려운 치매

황경춘

2012년 05월 14일 (월) 00:20:49

불과 수 년 전만 하더라도 거의 모든 사람이 천벌(天罰)처럼 느끼며 두려워했던 암은 이제 의학의 발달로 거의 정복된 듯합니다. 암으로 진단받았을 때 이를 환자에 직접 통고하느냐의 문제도 한동안 의사와 가족 간에 윤리성과 실효성 문제로 고지 당위성(當爲性)에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이 문제도 해결이 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현대의학도 속수무책인 치매(癡呆) 문제가, 한때의 암처럼, 되도록 큰 탈 없이 인생을 마무리 짓고자 하는 노년층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얼마 전 보건당국에 의해 이 치매도 암처럼 40~50대의 젊은 층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일본의 한 종합 월간지가 사회 저명인사 40명에게 어떤 식으로 임종을 맞이하고 싶으냐고 설문 조사한 것을 기억합니다. 엉뚱하게도 두 사람이 암을 거론하여 제 호기심을 끌었습니다. 그분들의 논리가 아주 정연하였기에 다른 분의 회답은 별 관심 없이 읽고 그분들 이야기만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암을 선택한 두 분 중 한 사람은 일본의 유명한 방사능 전문 교수로, 그의 독특한 암 치료에 관한 이론은 저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분들의 이야기는 암은 환자에게 인생을 마무리할 최소한의 시간 여유를 주며 게다가 거의 모든 암 환자는 운명 얼마 전까지 의식을 유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상당히 시사(示唆)하는 점이 많았습니다.

1960년대 초에 저희 아버지는 잇몸 암으로 진단되었습니다. 의학이 지금처럼 발달되지 않은 그 당시였지만, 아버지는 1년 반 연명하고 임종할 때까지 뚜렷한 의식을 유지했습니다. 유가족을 당황시키지 않는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주며 돌아갔습니다.

그 뒤 가까운 친척 몇 분도 암으로 돌아가고 암이 국민 사망원인의 수위로 밝혀져, 암에 대한 공포는 70을 지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제 경우, 그 공포의 대상 자리를 빼앗은 것이 바로 치매입니다. 치매는 뇌의 인지(認知) 기능을 못 쓰게 만드는 것으로 초기에는 건망증과 비슷하지만 결국에는 인간을 망각의 나락(奈落)으로 떨어트리는 무서운 병입니다.

이웃 나라 일본은 오래 사용해 오던 치매라는 단어가 환자를 비하(卑下)하고 가족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준다 하여 2004년에 후생노동성이 이를 행정용어로 ‘인지증(認知症)’으로 바꿔 쓰기로 했습니다. 학술용어는 아니었지만 일본의사회도 회원에 이렇게 고쳐 부르도록 지도를 하여, 현재는 거의 통일된 용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극히 일부 의료계 인사가 언론에서 이 단어를 쓰는 것을 본 적이 있으나 공식적으로는 예전대로 치매로 부르고 있습니다.

초기에 건망증 비슷하게 시작하여 끝내는 인생의 반려자였던 배우자마저도 몰라보는 비극을 직접 보거나 들을 적마다, 거의 운명할 때까지 의식을 잃지 않는다고 그 무서운 암을 선호한 앞에서 소개한 이야기를 새삼 생각해 봅니다.

흔히 우스갯소리로 사용하는 건배사 ‘9988234’는 단순히 편하게 고통 없이 세상을 떠나자는 뜻으로 시작되었으리라 믿으며, 이것이 치매로 인생의 마침표를 찍자는 의미는 절대 아닐 것입니다. 다만 가족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편안히 떠나자는 속마음을 드러내는 건배사일 것입니다.

부친을 암으로 잃은 저에게 치매로 인한 비극도 바로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아버지 네 형제 바로 밑에 고모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극진한 불자로 일 년의 거의 반을 전국 사찰 방문으로 보내며, 서울의 도선사에도 자주 들러 그럴 때마다 우리 집을 방문하여 아이들의 사랑을 받은 고모할머니였습니다.

시골에 사업가로 성공한 아들을 두어 행복한 삶을 이어가던 이 고모가 배회성(徘徊性) 치매 환자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입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지방의 유지였던 아들의 체면을 손상시킨 일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돌아가기 전에는 아들 부부와의 사이도 극히 나빠졌습니다.

이처럼 치매만은 현대의학으로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 무서운 암에서 살아남은 많은 분의 경험담이 매스컴에 소개되고 있지만, 치매를 치유하여 정상생활로 돌아왔다는 경험담은 한 건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재의 의학으로서는 치매의 진도를 약간 늦춘다는 이야기는 듣지만 치매를 예방하거나 완전 치유한다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70~80대의 소위 후기 고령자가 암 이상으로 치매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당연합니다. 사랑하던 배우자나 아이들조차 분별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본인도 본인이거니와, 막대한 정신적, 물질적 부담을 오래 감당해야 하는 배우자와 가족들의 비참한 환경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암의 경우와 달리, 치매에 관한 통계가 좀 부실한 것은 병의 성격상 어느 나라나 예외가 아닌 듯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8년 숫자로 65세 이상 인구의 8.4%인 약 42만 명이 치매환자였다는 보도가 있었고, 치매환자는 20년마다 두 배로 느는 경향이니 이 추세대로 가면 2027년에는 백만을 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얼마 전 건강보험공단 숫자라 하여 2010년에 파킨슨병을 합친 노인성 뇌질환으로 진단을 받은 총수가 111만2천 명이라고 보도되었습니다. 이 중 40~50대 환자 수가 2005년에 비해 1.3배가 증가한 22만3천 명이라 했습니다.

절친한 친구 하나가 최근에 인지 기능에 문제를 일으켜 외부와의 접촉을 삼가하고 있습니다.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한 생활을 90에 가까운 지금까지 이끌어 온 친구였기에 제 충격은 더욱 컸으며, 그의 평소의 생활양식을 잘 아는 제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치매의 마수는 바로 제 가까이에 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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