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입니다. 화사한 날인데도 사물의 윤곽이 흐릿했어요. 먼 산에 아지랑이가 낀 듯, 안개 속을 거니는 듯, 눈앞에 곤충이 날갯짓 하듯 어른거리더군요. 가까운 교통 표지판도 들떠 보여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참으로 세상이 수상하구나. 그래, 60줄이니 나도 늙어가는 모양이로다. 하긴 그럴 때도 됐지. 그래도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노화현상이 늦게 찾아오는 것일 거야.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

가만, 눈앞이 어른대고 흐릿한 것은 원래 삶 자체가 모호하고 불안정해서 그런 것일까? 그럴듯한 자위를 해보아도 석연찮은 느낌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왜 이럴까? 컴퓨터 작업을 많이 해서 눈에 과부하가 걸려서일까. 아마 그런지도 모르겠구나. 주로 컴퓨터를 사용해 글을 쓰니까. 시대가 달라졌으니 초고는 육필로 쓰더라도 컴퓨터에 저장한 후 수정 작업을 합니다.

원래 글을 일필휘지로 써대지 못하는 스타일이기도 하지만 쓴 글도 몇 번이고 바꿔 씁니다. 외부 원고는 마감 날까지 끊임없이 고쳐 써요. 됐다 싶어 발송하고 나면 당장 잘못된 부분이 눈에 띄는군요. 꼼꼼히 수정해 재전송합니다. 인쇄돼 나온 글에 논리의 잘못이나 오탈자가 보이면 실망스러워 자해(自害)하고 싶답니다. 안경을 껴서인지 까다로울 것 같다는 말을 주위로부터 듣곤 해요. 그 말이 맞는 듯합니다. 특히 '옷, 여자, 글' 세 가지에 대해선.

으레 그러려니 안경을 쓰고 벗지만 그에 따른 상황 변화는 변검(變瞼)을 보듯, 비 온 뒤 먹장구름을 뚫고 열리는 하늘을 보듯 신비합니다. 안경을 걸치는 순간 먼 곳의 산하(山河)가 친밀한 사람처럼 얼굴을 들이대고, 가까운 건물과 풍경들에게 선명한 규격(規格)이 생겨나며, 주변의 작은 사물들은 저마다 느낌표(!)를 달고 있어요. 안경을 벗으면 이 모든 것들은 일순 수런거림과 움직임을 멈추고 잠속으로 빠져드는군요. 눈을 뜨면 습관적으로 안경을 찾아 쓰는 내게 안경은 숨을 쉬지 않을 뿐 필수불가결한 장기(臟器)입니다. 그것은 사용자와 한 몸이어서 분리할 수 없지요.

마찬가지로 글 쓰는 일도 나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습니다. 글을 쓰지 않고도 태연히 살 수 있었는데 그렇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됐으니 무거운 짐을 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글을 쓰면 쓸수록 삶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아 막막하기도 합니다. 원래 글 쓰는 일 자체가 삶의 외곽을 더듬는 것일까요? 어쨌거나 글 쓰는 일이 삶의 존재 이유처럼 작용하니 좋은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술의 본질은 궁핍과 결여에 있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크기와 종류는 다를지언정 누구에게든 결손 부분이 있을 것이에요. 글쓰기의 효능이 '소통(疎通)'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실은 '결핍된 부분을 내보이고 그것을 서로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닐는지요.

이제 그만 진실을 말해야겠군요. 사물이 어렴풋이 보인 것은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했음을. 어처구니없지만 책 읽을 때 쓰는 안경을 무심코 쓰고 나간 것이죠. 작은 실수라 해서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밤눈이 어두운 터에 비 내리는 저녁 돋보기를 쓴 채 차라도 몰고 나갔다면 큰 어려움을 겪었을 터이니까요. 실수의 교훈은 비슷하거나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음에 있겠죠. 하찮은 실수가 성찰로 이어지고 큰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보다 다행스런 일이 없으련만.

생각을 진전시켜 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사소함'이 때로 세상을 바꾸는 씨앗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작은 일이 다만 시작되고 오직 꾸준히 지속된다면…. 그것에 우리네 삶의 참다운 비의(秘意)가 있는지 모르죠. 글쓰기 역시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다방면으로 섭렵하고[多讀], 수련을 멈추지 않으며[多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면[多商量] 좋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꿈꿉니다. 산들 바람이 바위를 깎고, 물방울이 쇠를 뚫으며, 나비의 끊임없는 가녀린 날갯짓에 큰 바람이 불고 해일이 일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