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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카드의 살색
안진의 2012년 05월 17일 (목) 00:24:13
미술대 대학원생들에게 자유롭게 소재를 선택하여 색채분석을 한 후 발표를 하라고 과제를 내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쯤 지나 한국말이 유창한 중국인 여학생은 ‘아가씨 카드에 나타난 색채’라는 주제를 발표했습니다.

‘아가씨 카드’가 무엇일까. 스크린에 자료 화면이 뜨자, 아가씨 카드의 정체를 궁금해했던 모두가 한바탕 깔깔 웃었습니다. ‘아가씨 카드’라는 것은 아가씨들을 타깃으로 하는 신용카드도 아니고, 그야말로 유흥업소 아가씨들의 홍보 사진이 담긴 손바닥 반만 한 종이카드였습니다.

순간 언젠가 방문했던 일본 신주쿠의 밤, 길거리 바닥을 현란하게 적셔 놓았던 유흥업소 아가씨들의 모습이 담긴 카드가 아른거렸습니다. 조명까지 갖춘 입간판 안에 메뉴판처럼 배열되어 있거나, 길거리의 주차된 차량에 즐비하게 꽂혀 있던 그런 카드였습니다.

저는 왜 그 카드를 연구대상으로 삼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여학생은 머뭇거림 없이 자취를 하고 있는 동네에서 그런 카드를 많이 보았는데, 그저 예뻐서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변의 친구들도 그 카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공통의 관심사가 될 수 있겠다 싶어 색채분석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색채분석 결과 ‘아가씨’들의 노출된 피부에서 추출되는 연한 주황이 주조를 이루었습니다. 이외에 검정이나 흰색과 같은 무채색과 빨강이나 노랑, 파랑과 같은 선명한 원색이 배색되었지만 이는 카드가 눈에 띄기를 바라는 이유에서일 뿐, 어디든 빠지지 않고 드러나는 색은 연한 주황 즉 관용적으로 살색이라고 부르는 색입니다.

일명 ‘아가씨 카드’에 나타난 것처럼, 살색에서 에로티시즘적인 성적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회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뒷모습이지만 풍만한 엉덩이와 가는 허리, 그리고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손짓이 성적 유혹을 도발하는 쿠르베(Gustave Courbet)의 <샘>이라는 작품에서 살색은 어두운 배경 속에 흰 피부 톤으로 시선을 끕니다.

   
  쿠르베, <샘>, 캔버스에 유채, 128x97cm,1868, 오르세 미술관  
여성의 성기를 부각하여 그린 쿠르베의 <세계의 근원>이나 <세계의 근원>에 빗대어 가랑이를 벌린 두 다리 사이의 남성의 성기를 그린 오를랑(Saint Orlan)의 <전쟁의 근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연하거나 붉은 주황의 살색이 주조를 이룹니다. 이러한 색들은 음모나 검붉은 색의 배경과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성적 느낌을 더욱 배가시킵니다.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살색 표현은 희거나 붉거나 초록빛을 띠기도 하지만 피부색이라는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붉은 천 위에 누운 여인의 누드>에서 보는 것처럼 천이나 스타킹, 옷, 머리카락 등의 일부분에만 빨강, 노랑, 파랑 같은 원색과 검정색 등을 사용하여 살색과 경쾌하게 대비시킵니다.

다른 한 번은 학부의 색채심리 시간에 학생들에게 ‘섹시(sexy)’하다고 느끼는 색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흰색, 분홍, 빨강, 보라 등이 나왔고, 검정색이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남학생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살색이요”라고 말해 온통 박장대소, 교실이 난리가 났습니다.

   
  에곤 쉴레, <붉은 천 위에 누운 여인>, 종이 위에 과슈와 블랙 크레용, 개인소장, 1914  
아이들이 웃는 데에는 남학생이 이야기한 살색이 에로티시즘이라는 맥락에 제대로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얘기한 아가씨 카드나 누드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누드톤(nude tone)’으로서의 살색, 즉 ‘벗었다’라는 언어를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그 살색이라는 색채는 언어보다도 빠르고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다가와 좌중을 순식간에 웃겨놓은 셈입니다.

요즘은 ‘섹시(sexy)하다’는 말을 참 많이 보고 듣습니다. TV를 비롯한 매체에서뿐 아니라 심지어는 11살 초등학생인 딸아이에게서도 “엄마 나 섹시하지?”라는 말에 어이없어하며 웃습니다. 예전에는 ‘섹시’라는 단어조차 입에 올리는 것이 민망했지만. 요즘 ‘섹시’는 자랑스러운, 뽐내는, 멋진, 분위기 있는 등, 여러 가지 우월적 이미지가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섹시한 색은 개인별로 다양해집니다. 섹시한 색의 보편적 이미지는 더 이상 에로티시즘의 맥락에만 갇힌, 즉 ‘벗었다’는 의미의 살색만은 아닌 셈입니다. 그러고 보니 색채를 인식한다는 것은 언어의 사용과 관련이 깊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언어의 개념을 확실하게 확인시켜 주는 것 중에 하나가 색채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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