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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바지사장
박상도 2012년 05월 23일 (수) 01:18:10
15년 전 고발프로그램을 진행할 때였습니다. 서울 외곽에 자리잡은 꽤 유명한 나이트클럽이 있었습니다. 조직폭력배가 운영한다는 이 나이트는 상습적으로 미성년자를 입장시켜서 사장들이 구속되고 영업정지 처분을 수차례 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장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한 이유는 불법 행위로 사장이 구속되면 나이트클럽의 실제 주인인 조직 폭력배가 다른 바지 사장을 고용했고 그 바지 사장이 구속되자 또 다른 바지사장을 고용해서 나이트 클럽을 운영했기 때문입니다. 영업정지야 날짜만 지나면 다시 장사가 가능한 것이고 실제 주인이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바지 사장이 구속되는 것이니 조직 폭력배로서는 더욱 과감하게 불법영업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법체제의 허술한 점을 그들의 조직력으로 극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는 것이 직업인 저는 우선 '도대체 바지사장이 어디서 나온 말일까?’ 궁금했습니다.
바지사장의 바지는 ‘총알받이’의 '받이'가 '바지'로 변한 것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는 역할입니다. 물론 진짜 사장은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지난 4ㆍ11선거 경선 부정으로 후보가 바뀐 곳이 있었습니다. 문제의 장본인인 당시 통합진보당의 대표는 사퇴 의사가 없다고 버티다 여론의 뭇매를 맞자 선수를 바꿔서 선거를 치렀습니다. 당 대표인 후보가 경선 부정을 저질렀다면 후보 개인의 문제만이 아닌 당차원의 흠결이 되는데 선수를 바꿔서 총선을 치른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같은 당의 후보끼리 경선을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경선 부정으로 선의의 피해를 입은 상대당의 후보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도리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불법영업으로 바지사장이 구속되자 새로운 바지사장을 그 자리에 앉히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보였습니다.

보수와 상반되는 이념인 진보는 역사를 발전시킨 원동력이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시민들이 내걸었던 앙시앙레짐의 타파는 진보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 중 하나입니다. 또한 자스민 혁명으로 촉발된 중동국가의 민주화 열풍 역시 진보 세력이 대중의 지지를 얻게 될 때 역사를 바꾸는 힘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스민 혁명의 경우 인터넷과 SNS같은 매체가 혁명의 성공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역사의 발전이 물질적인 측면에서 이해되는 유물론적 사관을 뒷받침해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극심한 경재난과 독재 정권의 부패가 혁명을 촉발했다는 점에서 과거 독재정권에 항거한 다른 나라의 예와 그 내용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1987년 독재에 항거하여 민주주의의 승리를 이끌어낸 경험이 있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박종철 학생의 물고문 사건과 이한열 열사의 희생까지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신념을 좇다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당시에는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이 진보 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거슬러 올라 가면 진보가 추구하는 이념은 시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산업혁명의 초기 단계에는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진보적인 사고였습니다. 막스 베버는 그의 저서인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에서 ‘ 부(富)를 추구하고 축적하는 것은 신의 소명을 다하는 선한 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이전의 말씀과는 정반대의 주장이었습니다. 가톨릭의 부패와 시민사회의 등장이라는 역사적 변환기에 자본의 축적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한 일은 상당히 진보적인 생각이었고, 자본주의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보수화된 자본주의는 오늘날 심각한 저항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We are 99%’를 외치는 월가의 시위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요구하는 진보세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변증법의 논리에 따르면 진보는 정ㆍ반ㆍ합의 ‘반’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현 사회체제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발전적 모델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진보의 성향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보는 그 태생적 특성상 절대 다수가 되기 어렵습니다. 절대 다수가 되는 순간 진보는 이미 그 특성을 잃게 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는 정ㆍ반ㆍ합이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변증법의 논리와도 같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진보세력은 민주주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보는 그 특성이 모호합니다. 이남곡선생의 저서 ‘진보의 연찬’에 의하면, 진보의 정의를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억누르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억누르는 것으로 물질적 결핍과 불합리한 제도와 낡은 의식을 꼽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민주주의를 이룩하면 우리가 자유롭고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 명의 민주투사를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탈권위를 표방한 대통령도 우리 손으로 선출했습니다. 그리고 보수적 성향의 현 대통령도 역시 우리 손으로 뽑아주었습니다. 그때 그때 우리의 의사를 반영한 지도자를 우리는 선출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땅에 새로운 진보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질적인 측면에선 아직도 개선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미 민주주의의 틀을 갖춘 현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진보는 새로운 방향을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편재된 부에 대한 적절한 규제라든가 신 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를 개선하기 위한 운동이나 환경문제에 대해 더욱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은 우리의 삶을 더욱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드는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진보는, 아니, 정확하게 말하지면 ‘진보’라는 이름을 내건 정당은, 아직도 낡은 패러다임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바지사장을 연상케하는 후보 돌려막기와 중앙위원회에서의 폭력 사태는 ‘진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집단이 절대로 보여줘서는 안 되는 행위였습니다. 정당은 정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번처럼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행동은 그들이 항상 비판해 오던 것을 자행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난 수십년간 진보가 외쳤던 구호 속에는 ‘도덕적 우월감’이 녹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가 이번 선거에서 통합진보당의 약진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기존 정치가 못마땅해서 통합진보당을 선택한 유권자들은 또 한번 절망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갈아봐야 더 못산다’라는 반세기도 훌쩍 넘은 정치구호가 이번 통합진보당의 자멸을 보면서 씁쓸하게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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