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추상미술 감상하는 유치원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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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추상미술 감상하는 유치원생들

이성낙

2012년 05월 31일 (목) 01:26:21

얼마 전 국립 현대미술관(과천)이 기획한‘한국의 단색화(單色畵ㆍKorean Monochrome Painting)’ 특별전 개막식에 참석해 전시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회는 주제가 말하듯이 한국 현대 추상미술에서도 한 가지 색만을 이용한 작품들의 ‘모음’, 그래서 ‘한국 단색화’라는 주제로 모두에게 친숙한 김환기 박서보 이우환 등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던, 전시 기획자의 의도가 잘 구현된 아주 각별한 특별전이었습니다.

개막식 행사는 빼놓을 수 없는 절차겠지요. 특별한 계기에 주최측이 개막식을 찾아온 참석자들에게 예를 갖추는 것이 개막식이 가지는 코드인가 싶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주최측은 개막식이 가지는 특수한 행사의 이벤트성이라는 한계를 넘기가 어려운 것 같았습니다. 특히 미술작품 전시 관련 개막식인 경우 개막식 행사 직후 전시작품 관람이라는 절차가 따르기 마련인데, 전시장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설치된 작품들을 일시에 몰려다니는 ‘군중’ 사이에서 차분히 감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매번 느끼는 아쉬움입니다만 어수선한 분위기를 배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개막식에 즈음하여 전시 기획자와 기쁨을 함께 나누기도 하고, 준비하느라 고생한 것을 위로도 하고, 전시기획을 구상하고 준비하였던 주최측의 미술사적 의도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여 여태껏 기회가 주어지고 시간이 허락하면 적극 참여하여왔습니다.

그래서 좋은 전시회는 다른 날 조용한 시간에 다시 찾아가 작품을 감상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이번 과천 ‘단색화 전시’인 경우 우리 미술계가 꾸준히 추구하였던 미니멀리즘의 한 장르인 ‘단색화의 모음’을 보는 것으로 마치 조선시대 백자(白瓷)의 조용한 선(禪)세계를 만나는 듯하였습니다.

화창한 봄 날씨에 신록이 우거진 숲 속 같은 곳에 자리잡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아름다운 풍광을 머리에 떠올리며 조용한 감상의 기쁨을 기대하며 과천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미술관에 이르는 길이 방문객 차량들로 꽉 차 움직임이 둔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현대미술 애호가들이 많다는 사실에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미술관 정문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대낮 눈앞에서 펼쳐진 현실세계는 너무 실망스러웠습니다. 미술관 정문 앞 광장은 어른 관람객들보다 온통 노란색 유니폼을 입고 즐겁게 재잘거리며 입장을 기다리는 유치원생들의 군상으로 붐볐습니다. 유치원생들을 지도 관리하는 선생님들이 불어대는 호루라기 소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네스 북에라도 기록될 황당한 상황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이었습니다. 꼬마 유치원생들이 둘씩 손을 잡고 줄지어 미술관으로 입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유치원생들이 현대미술에서도 가장 난해하다는 추상미술, 그것도 미니멀리즘의 미술품을 감상하기 위해 당당하게 입장하는 것입니다. 당혹스럽기도 하고 예사롭지도 않아 유치원생들을 따라 들어가 전시장 안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아이들은 시간이 조금 지나자 뛰어다니기 시작하더니 어른들 사이를 거침없이 휘젓고 돌아다녔습니다. 전시장은 아이들의 실내 운동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뭐 다른 것을 어린아이들에게서 기대하겠습니까? 하도 답답한 생각에 미술관 관리인에게 어린 유치원생들이 어떻게 미술관에, 그것도 단체로 들어올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전시장 안내인들도 너무 어렵다고 사정 이야기를 합니다. 철없는 어린애들이 들어와 고가의 전시작품을 만지고 훼손하지는 않을까 해서 걱정이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관람객들의 불평도 많다고 합니다. 즉 미술관 관리 차원에서 어린아이들의 입장을 왜 시켰느냐는 꾸중 차원의 불만을 듣는 것이 억울하기까지 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국ㆍ공립 박물관 및 미술관 출입을 무료로 개방하면서 생긴 새로운 현상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문화애호가들의 저변 확대 또는 모든 국민들에게 문화예술품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높은 뜻이 있어 국ㆍ공립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무료 개방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박물관과 같은 국가가 운영하는 공공기관의 입장을 무료 또는 유료화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접어두고, 어린아이들의 단체관람을 허용할 것인지는 심각하게 재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유치원생들과 같은 아이들의 박물관이나 미술과 같은 공공시설 입장을 보호자의 사려 깊은 보호가 없는데도 허락하는 것이 옳은지에 있습니다.

문득 수년 전 서울 시립미술관(정동)의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특별전’에서 겪었던 유사한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비가 오면 관람객이 뜸해진다는 통념만을 믿고 강한 빗발을 마다하지 않고 미술관을 찾아갔었습니다. 예상대로 조용한 전시장 분위기는 국내 미술 전시장에서는 드물게 맛볼 수 있는 쾌적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가 소란해지더니 노란색 우의(雨衣)를 입은 유치원생들이 몰려들어 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전시장이 아니었으면 아주 귀여울 ‘병아리 집단’을 보는 즐거운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시내 여러 유치원에서 밖에 비가 오는 날씨에 원생들을 야외에서 시간을 보내기가 어려우니 비를 피할 곳으로 시립미술관을 택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보호자의 세심한 안내 없이 유치원생들은 물론 어린 아이들의 박물관 미술관 또는 음악당 같은 문화감상시설의 입장은 아이들의 교육적 시각에서 사려 깊은 배려가 절실합니다. 많은 전문가들도 난해하다는 추상미술 전시장으로 유치원생들을 몰아넣은 비교육적 발상을 방관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고, 허용되어도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화행사 입장 자유화시책이 불러 난장판이 된 문화예술시설의 환경을 보면서 오늘 우리가 겪고 있고 앞으로 다가올 ‘천박한 복지정책의 재앙’을 보는 듯싶어 걱정이 많이 됩니다. 무엇보다 참된 복지개념이 덩달아 훼손될까 더욱 걱정이 되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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