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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개 있다
신아연 2012년 06월 13일 (수) 01:59:44
늘상 다니는 동네 마트 앞에 가면 주인을 따라 산보를 나왔다가 주인이 장을 보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는 개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마트 안으로는 개를 데리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입구 기둥에 잠깐 묶어 두고 얼른 장을 보고 오는 것입니다.

개를 무척 좋아하는 저는 ‘마트 앞 기둥 나들이’를 즐겨합니다. 개들의 지루함도 덜어줄 겸, 가능하다면 나쁜 사람들의 해코지도 막아줄 겸,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그네들과 노는 것입니다.
길면 20분, 짧으면 5분가량 기둥에 묶인 채 주인을 기다리는 개들의 태도는 대략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주인이 자리를 뜨기 무섭게 낑낑 신음을 하고 온 몸을 발발 떨어대며 불안과 초조로 일관합니다. 겁이 나는 상황을 벗어나 보려는 몸부림으로 깡깡 짖어대지만 그럴수록 두려움과 공포에 압도됩니다. 처음부터 천애고아였던 듯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주인이 있다는 사실조차 믿으려 하질 않아 보입니다. 성마르고 예민함이 지나쳐 패닉과 공황 상태에 빠져 불행해하는 이런 개들과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관심을 보이며 안심을 시키려 해도 소용없으니 그저 측은하게 바라볼 밖에요.

두 번째는 주인이 등을 돌리자마자 헤프게 구는 녀석들입니다. 주인이 오거나 말거나 , 첫 번째 개들과는 또다른 의미로 처음부터 혼자였으며 자유 그 자체였다는 듯 지나는 사람들마다에게 아양을 떨며 발랑 누워 좋아 죽겠다는 식입니다. 순간순간의 즐거움에 취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살핀다거나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안절부절 못하는 첫번 부류하고는 정 반대로 행동합니다. 저로서는 이런 개들을 데리고 노는 것이 가장 쉽지만 자기 재미에 취해 변심을 밥먹듯 하는 철딱서니 없는 녀석들이 가끔은 얄밉습니다.

그런가 하면 숫제 바닥에 드러누워 태평스레 잠을 자는 것들도 있습니다. 주인이 반드시 다시 온다는 굳건한 믿음이 있어서라기보다 상황이나 사태 파악에 무딘 탓에 변화된 환경을 별다른 위협 요인으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늘 명료하게 깨어 있질 못하고 반쯤은 조는 듯 살아 가는 평소 습관에 기인한 것이니 일생, 당장 죽을 것처럼 불안할 것도, 뛸 듯이 기쁠 것도 없이 이래도 심드렁, 저래도 심드렁합니다.

언뜻 보기엔 성격이 좋아 그런 것 같지만 실은 나태와 게으름의 타성에 젖어 깨어 있지 못하는 탓입니다. 그런 점에서 비록 ‘불안’으로 깨어 있을망정 그래도 깨어 사는 첫 번째 부류보다 윗길이라고 하기 힘듭니다. 이런 것들하고는 그럭저럭 ‘코드’가 맞아 쭈그리고 앉아 쓰다듬어 주곤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유순한 태도로 반쯤 졸면서 스르르 눈을 감습니다.

마지막은 일편단심, 초지일관 자세 한 번 흩뜨리지 않고 정면을 응시한 채 돌아올 주인을 준비된 믿음으로 기다리는 흔치 않은 부류입니다. 훈련된 충성심과 내면의 정결함으로 무장된 이런 개들에게는 감히 집적댈 엄두가 안 납니다. 어쩌나 싶어 눈 앞에서 알짱거려 보지만 마치 투명인간을 대하듯 제게는 눈길 한 번 주는 법 없이 행여나 전방 시야가 가려질세라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자세를 다잡습니다. 주인과 온전히 교감하며 그 사랑을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자부심과 단아함의 ‘아우라’ 에 휩싸이며 미물임에도 존경심이 듭니다.

근 2년에 걸친 마트 앞 개들에 대한 제 나름의 ‘고찰’을 사람인 제게 적용해봅니다. 저는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개 주인’을 ‘하나님’으로 설정하고 ‘제 자신’을 ‘개’로 쳤을 때 어느 부류, 어느 위치에 있는지 반성해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개’처럼 현실에 취해 이 세상이 전부이고 물질에 이끌려 아무 생각없이 살았던 적은 없었지만, ‘첫 번째 개’처럼 삶의 실존적 불안감을 다양한 철학과 신념, 인본주의적 가치관에 의지하여 해결하려다 뿌리 없는 나무처럼 쇠락하며 절망에 빠진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내 존재의 근원이자 나의 지성 너머에 존재하면서 매일 매일의 내 삶에 인격적으로 개입하는 절대자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세 번째 개’와 같이 불신앙자는 아니되, 게으르고 나태해서 바싹 깨어 있지 못하는 상태를 지나고 있는 중이지만 바라옵기는 앞도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주인의 사랑에 송두리째 이끌리는 ‘네 번째 개’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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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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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60.XXX.XXX.96)
오늘 새벽 큐티가 호세아서 였는데, 제사장들이 도피성에서 벌이는 행각들, 갈 때까지 간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한국교회도 갈 때까지 갔지요... '하나님을 안다'면 있을 수 없는 엽기적 행태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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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5 06: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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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110.XXX.XXX.229)
오늘저녁 뉴스시간에 충현교회 원로목사가 편법으로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었다가 배신(?) 당하고 격앙된 목소리로 아들을 성토하는 민망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 너무 멀리 온것은 아닐까? 다시 돌아갈 길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아연님의 바람처럼 주인의 이끌림에 온전히 맡기는 초심으로 돌아가시길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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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4 23:2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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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us (220.XXX.XXX.168)
깊이 생각하는 능력에 놀랍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결정을 떠나 일단 생각하게 도움을 주시는 능력 또한 돗보입니다. 맑은 이 아침, 새벽 새들의 울음도 청청한 이 시간에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준 신아연 작가님의 글이 멋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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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4 05: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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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완 (60.XXX.XXX.96)
신아연 선생님

참으로 재미 있게 읽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점점 철이 들면서 네 번째 부류로 성장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선생님의 정확한 관찰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좋은 글 더 많이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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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3 21:4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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