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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도 늙는구나(2) - 네번째 데뷔곡
임철순 2007년 06월 11일 (월) 04:23:38

 노래를 기준으로 사람들을 나누면, 이 세상에는 노래를 만드는 사람과 부르는 사람 두 부류가 있습니다. 작곡가든 가수든 노래를 만드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스스로 노래를 만들고 직접 부르기까지 할 수 있다면 더 행복할 것입니다. 작사 작곡 노래 이렇게 세 가지를 다 하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은 이 세상에 태어나 남이 만든 노래만 부르다가 이 세상을 떠나갑니다. 새로운 노래를 보태어 남기기는 고사하고, 노래를 만든 사람의 의도 대로 그 박자와 곡조에 맞춰 정확하게 부르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수들은 데뷔곡을 통해 자신을 알리고 새로운 노래의 세계를 펼쳐갑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가수들에게만 데뷔곡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나 남들이 그 의미를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사람에게는 누구나 데뷔곡이 있습니다. 삶의 각 단계를 지나는 통과의례와 같은 의미를 지닌 노래들입니다.

 나의 데뷔곡은 무엇인가.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함호영 작시 홍난파 작곡 <사공의 노래>, 이어 스티븐 포스터의 <금발의 제니>, 그리고 양명문의 시를 변훈이 작곡한 <명태>, 이 세 가지입니다.

 맨 처음 중학교 1학년 때, 친척집에 여러 집 가족이 모인 어느 날, 갑작스럽게 노래경연이 벌어졌습니다. 수줍어 몸을 빼고만 있다가 요새 학교에서 배운 걸 해 보라는 어머니 말에 얼굴이 빨개진 채 일어나서 부른 게 <사공의 노래>였습니다.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간다 물 맑은 봄바다에 배 떠나간다..., 이런 가사입니다.
 
 나는 이 노래를 통해서 “나는 물 맑은 봄바다입니다, 나는 착실한 모범생입니다, 나는 비뚤어지지 않겠습니다, 우리 집도 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삶의 출발을 알린 것 같기도 합니다. 제목은 사공의 노래인데도 어디까지나 한결같이 단정하고, 격함과 흐트러짐이 전혀 없는 노래입니다.

 이어 고등학교 2학년의 봄, 남녀학생 봉사서클이 한강 어느 섬에 야유회를 갔던 날, 지금은 섬도 없어지고 이름도 잊었지만 그 섬의 솔밭에서 <금발의 제니>를 불렀습니다. 둥글게 둘러 앉아 무슨 놀이를 하다가 벌칙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한 송이 들국화 같은 제니 바람에 금발 나부끼면서 오늘도 예쁜 미소를 보내며 굽이치는 강언덕 달려오네….

 그보다 3년 전 부산에 갔을 때 이종사촌 누나가 가르쳐 준 노래입니다. 그 누나는 얼마 있다가 뇌막염에 걸렸고, 열아홉 살로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고통이 몹시 심했는데도 “어무이, 너무 아픕니더” 그런 말이나 겨우 할 정도로, 착하게 누워서 착하게 기도하며 착하게 아프고 착하게 죽음과 싸우다 착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누나가 있었으면, 나를 이해해 주고 내 마음의 콧물을 닦아 주는 누나가 있었으면 하고 늘 바랐던 나는 그녀가 너무도 인상적이었고, 그 누나의 죽음 때문에 <금발의 제니>를 더 좋아하게 됐습니다. 나는 이 노래를 통해서 “나도 사랑을 압니다, 나는 사랑하고 싶습니다, 금발의 제니가 나에게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노래를 부른 이후 사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마디를 덧붙이면 <금발의 제니>는 역시 유씨 비욜링의 노래가 제일 좋습니다.

 가족과 친척들 앞에서 <사공의 노래>, 또래 친구와 이성들 앞에서 <금발의 제니>를 부른 뒤, 세 번째로는 신문사 선배와 동료들 앞에서 <명태>를 불렀습니다. 그것은 1974년 1월 견습기자 환영회 자리였습니다. 자기소개를 한 뒤, 이번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를 알리려고, 인상 깊게 하려고, 남들보다 나아 보이려고 그런 것이지요.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 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길고 어려운 노래입니다. 
 
 나는 이 노래를 통해서 “나를 이 사회에서 받아 주세요, 나는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 한 직장인, 한 시민이 되려 합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이렇게 어렵고 긴 노래도 끝까지 부를 만큼 용기도 있고 활달합니다”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이 세 가지 노래를 부를 때 나는 예외없이 덜덜 떨었습니다. 어떻게 불렀는지 앞이 잘 안 보일 만큼 정신이 없었고, 힘든 고음부는 몸을 뒤틀고 목을 짜면서 새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나의 몸짓에는 당연히 과장과 치기가 섞여 있었습니다. 재미도 없고 흥겹지도 않은 노래를 떨리는 목소리로 눈치없이 부르는 쑥맥의 모습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이 세 가지 노래 부르기가 이제는 너무도 쉽습니다. 그것은 정말 일도 아닙니다. 대충대충, 새된 소리도 질러대지 않으면서 얼마든지 편하게, 능청스럽고 뻔뻔하게 힘 안 들이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의 데뷔곡들도 이제는 나이 들어 늙은 것이겠지요.

 네 번째 데뷔곡은 무엇인가. 새로 데뷔해야 할 일이 더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그런 무대에서 부를 수 있는 데뷔곡이 무엇이며 나에게 그런 노래가 있기는 한 것인지…. 요즘 계속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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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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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시 꺼벙이 덜렁이 (211.XXX.XXX.129)
이용백 원장님, 반갑습니다. 이제 자리가 잡혔습니까?
김미숙씨는 제가 아는 분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렇군요.
이렇게 사이트에 들어와 글을 남기고 가는 분들은
앞으로 더 복 받을 겁니다. ㅎㅎㅎ(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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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2 11:09:04
0 0
이용백 (211.XXX.XXX.211)
네번째뿐만 아니라 다섯번째, 여섯번째 노래도 준비해 주십시오.
--------------
저도 가슴에 남는 글을 써 보고 싶습니다. 부럽습니다.
답변달기
2007-06-11 18:26:42
0 0
김미숙 (70.XXX.XXX.172)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의 위를 날으는 ........
또한 그리고 그리다가 죽는 가엾은 넋은 가여운 넋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데뷔곡의 기억은 향수를 불러 옵니다.
아름다운 글입니다...
답변달기
2007-06-11 13: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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