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칼럼 | 게스트칼럼
     
나눔의 대상, 거래의 대상
김영관 2012년 06월 28일 (목) 01:08:54
얼마 전 친구 부부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한 연예인의 간증집회가 예산 문제로 무산되었다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이민 교회가 부담하기에는 벅찬 수준의 강사료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간증이라면 주로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이야기를 하는 것일 텐데, 강사료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나눔의 대상이었던 간증거리도 어느덧 사고파는 거래의 대상이 되었다는 뜻일까? ‘연인끼리 사랑의 흥정에 실패하여 헤어지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내게는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자기 농지에서 손수 땀흘려 재배한 쌀이며,야채, 과일을 시장에 가져가 파는 것조차 어색해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씨앗을 심어 싹이 트고 열매가 맺도록 노동력은 제공했지만 농사에 정작 중요한 흙과 햇볕, 그리고 비는 하늘이 제공한 것이라는 인식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변호사의 청구서에 잠깐 잠깐 통화한 전화 기록들에도 일일이 수임료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야박하게 느껴진 적이 있습니다. ‘머리 속에 있는 지식 좀 풀어 놓는다고 특별히 돈들 일도 없을 텐데’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눈으로 보고 만지며 먹거나 사용할 수 있는 것들뿐만 아니라 서비스나 지식, 정보도 사고파는 상품이라는 데 익숙하지 않던 때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모든 것들이 경제적 교환의 대상이라는 인식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만큼 자본주의의 시장경제에 익숙해진 탓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까지일까요? 팔고사는 것의 한계는? 자본주의의 시장에서는 종교적 체험도, 사회 봉사나 선행, 정신적 가치도 사고 팔 수 있는 것일까요?

지난해 3월, 일본을 덮친 쓰나미 현장에서 한 젊은 여인이 방송을 통해 주민들의 생명을 하나라도 더 구하려다 정작 자신은 목숨을 잃게 된 일을 신문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에서는 무엇이든 경제적 가치로 환원될 수 있고 그에 따라 거래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 여인의 생명도 불사한 용기와 희생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그 방송을 듣고 구제된 사람들의 수,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현재 및 미래 재산 상태, 그 사람들이 향후 보여 줄 사회 경제적 기여도등의 총합을 근간으로 그녀가 보여준 용기와 희생의 경제적 가치를 산출하면 가히 천문학적 수치에 이르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러한 시도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의미 있는 일로 간주하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경제적 대가를 기대하고 자신의 생명을 바친 것이 아님이 분명하고 그녀의 희생과 용기가 본질적으로 경제적 차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는 경제가치의 유무를 떠나서 경제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존재하며 따라서 시장의 상품처럼 거래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상품이 있다면 거래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정직, 헌신, 사랑, 용기와 같이 전통적인 도덕적 덕목들이 이런 부류에 속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값을 정하고 팔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그 가치를 인식하면서도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나누며, 받는 사람은 형편껏 진심을 담아 보답하게 됩니다. 거래의 대상이 아닌 나눔의 대상인 것입니다.

시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에서는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무엇이든 자본화할 수 있습니다. 서비스나 제품, 지식과 정보는 물론이고 여인들의 미에 대한 욕망도, 인간의 불확실성에 대한 원초적 불안도, 심지어는 타인의 불행, 타인의 생명과 죽음까지도 자본화될 수 있습니다. ‘보다 많이 누리는 삶이 아니라 보다 많이 소유하는 삶이 행복’이라고 믿게 만드는 자본주의는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떡으로 만들고 싶게 하는 유혹’이 도처에 숨어 있습니다. 개인이나 단체, 심지어는 국가까지도 그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경제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 많은 삶의 유혹들과 타협할 수 있습니다. 소비가 미덕이니까. 그러나 정말로 타협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나눔의 대상을 거래의 대상으로 만들려는 유혹입니다. 없애 버리고 싶은 바람이 아니라면 사랑의 징표로 주고받은 결혼 반지를 신발들과 함께 신발장에 보관하지는 않습니다. 나눔의 대상들에 값을 매기고 흥정하며 사고파는 행위는 결혼 반지를 신발장에 보관하며 신발 취급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그것들은 시장을 배회하며 거간꾼의 손을 거치는 순간 실체없이 무늬만 남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이야기 책에서만 전해지는 공룡처럼 화석화되거나 우리의 일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려 사전 속의 고어로만 존재하게 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모조품들이 생산돼 진품을 대신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결국 나눔의 대상들은 매매하는 순간 그 매매의 대상을 잃게 되는 역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은혜받은 자의 간증은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값을 정하고 값이 맞지 않아 무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정해진 입장료를 내지 않고는 예배에 참석할 수 없는 교회가 있다면 우리는 그 교회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강사료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연예인이 자신의 은혜의 경험을 거래의 대상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모임을 주최하려 했던 교회나 청중이 부동산 투자 전략 강연에 참여하듯 경제적 동기로 모인사람들이 아닐진대 강연료로 무산되었다는 뒷이야기가 본인들의 간증을 거래와 흥정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호주 시드니 거주
연세대 철학과 대학원 수료
MBA @ University of Queensland
LG 시드니 상사 법인 및 PNG Halla 법인 근무
Toppro Pty Ltd 대표
현 Samma Australia 대표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3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이승훈 (211.XXX.XXX.74)
예수께서 가난한 여인의 적은 헌금을 보고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여인이야 말로 이들 중 가장 많이 낸 자 이다.'라고 말했던 구절이 생각납니다.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서 경제적인 이익까지 탐하려는 이의 간증이 애초에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차라리 평범한 이의 진솔한 신앙고백이 더 좋은 간증이 될 수 있을거라 믿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답변달기
2012-06-29 09:19:55
0 0
김인곤 (211.XXX.XXX.129)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강사료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 연예인이 자신의 은혜의 경험을 거래의 대상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모임을 주최하려 했던 교회나 청중이 부동산 투자 전략 강연에 참여하듯 경제적 동기로 모인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강연료때문에 무산되었던 것입니다.간증을 거래와 흥정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답변달기
2012-06-29 08:12:46
0 0
김진원 (203.XXX.XXX.30)
다루기 쉽지 않은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문제를 제기한 후 설득력있고 분별력있게 전개하고 있는 논리가 돋보입니다.

지나치기 쉬운 우리 사회의 문제를 깊이 성찰하셨네요.
답변달기
2012-06-28 14:15:52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