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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보이나니…
박상도 2012년 07월 09일 (월) 01:20:45
미할리 칙스젠트미할리 (Mihaly Csikszentmihalyi)와 릭 이. 로빈슨(Rick E. Robinson)이 공동으로 저술한 The Art of Seeing이라는 책을 보면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깊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위해 쓴 이 책은 갤러리에서 일을 하는 예술분야의 전문가들을 인터뷰해서 예술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주된 줄거리는 ‘우리는 예술 작품을 우리가 아는 것에 비례해서 더 많이 그리고 더 깊이 감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지각적 차원(Perceptual Dimension)입니다. 이는 처음 예술 작품을 접했을 때의 느낌에 충실한 경우를 말합니다. 두 번째는 감성적 차원(Emotional Dimension)으로 예술 작품을 접했을 때 지속적으로 감동을 받는 경지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박물관에서 근무를 하는 큐레이터의 경우 같은 작품을 하루에도 여러 번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지속적으로 작품을 보게 되어도 그 감동이 전혀 줄어들지 않을 정도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차원이 높아져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가 지적 차원(Intellectual Dimension)입니다.

지적 차원에 대한 설명을 위해 그림을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래에 있는 그림은 렘브란트가 1653년에 그린 The Three Crosses입니다. 빛의 마술사인 램브란트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는 분들 또는 아래 스케치에서 빛의 방향을 묘사하기 위해 쓰인 대각선의 터치는 램브란트가 살던 시절에 쓰이지 않았다는 미술사적 사실을 아는 분들이라면 이 그림이 얼마나 위대한 작품인지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스케치로 보일 따름입니다.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듣기 전에 저는 단순히 그림이 표현하고자 했던 스토리에 치중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처형된 두 명의 죄수 이야기만을 떠올렸던 것이었습니다.

   
The Art of Seeing 에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최고의 차원을 지적인 차원(Intellectual Dimension)이라고 제시한 것은 조선시대의 문인인 유한준 선생의 글인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 而非徒畜也(지즉위진애 애즉위진간 간즉축지 이비도축야) 즉,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되며 볼 줄 알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그저 쌓아두는 것과 다르다”는 뜻과 일치합니다. 이 글은 “그러므로 그림의 묘는 사랑하는 것, 보는 것, 모으는 것, 이 세 가지의 껍데기에 있지 않고, 잘 아는 데 있다(故妙不在三者之皮粕而在乎知)”는 말 뒤에 나옵니다. 결국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는 것이 예술 작품의 감상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예술 작품뿐만이 아니라 음악의 경우에도 아는 만큼 감상의 깊이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피아노를 공부하는 딸아이 덕분에 클래식 음악을 자주 접하게 된 저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클래식에 별다른 지식이 없었을 때에는 거의 모든 클래식 음악은 지루하고 졸린 것으로 여겼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빨리 변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수백 년 전에 작곡한 곡을 계속 반복해서 듣고 있는 것인가?’ ‘같은 곡을 이 음악가도 연주하고 저 음악가도 연주하는 건 뭘까? 사골도 두세 번 우려내면 더 이상 국물이 나오지 않는데…’ 이런 모자란 생각으로 클래식 음악을 외면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저의 태도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딸아이가 피아노를 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피아노곡을 듣게 되고 많은 작곡가들의 일화와 그들이 살았던 때의 사회에 대해 알게 되면서 클래식 음악에 대해 이해의 폭이 넓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흐의 곡은 쇼팽의 곡처럼 화려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흐가 살던 시절에는 피아노라는 악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흐가 살던 시대에는 피아노의 전신(前身)이랄 수 있는 하프시코드(harpsichord)가 있었는데 이 악기는 피아노에는 있는 페달이 없어서 웅장한 소리를 낼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바흐의 곡을 연주할 때는 쇼팽의 곡을 연주할 때와는 다른 방법으로 건반을 터치해야만 제대로 된 바흐음악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클래식을 감상할 때와 전혀 모르고 감상할 때 그 감상의 깊이가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조금 더 욕심을 내서 미학적 감상 단계를 우리 사회에 적용해 볼까 합니다. 건강한 사회는 다양한 의견이 활발하게 교류를 할 때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서로의 의견에 귀 기울여주고 논의를 통해서 최선의 합의를 이루어 낼 때 민주주의는 완성됩니다. 이러한 이치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최고 단계인 지적 차원의 감상과 맥락이 닿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의 두 축인 보수와 진보의 대립을 보면서 서로를 잘 알 수 있게 교육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한번 보수는 영원한 보수’, ‘한번 진보면 백골이 되어서도 진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면 변절자취급을 받습니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니 아예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주장과 다른 주장을 하면 논쟁으로 풀어야 하는데 다른 주장을 하는 존재를 거부합니다.

몇 해 전 한꺼번에 몰려든 소송과 고발로 인해 고초를 겪은 진보 논객 진중권 씨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저는 논객입니다. 사회의 현상에 대해 제 주장을 펼치는 것이 제 일입니다. 제 주장과 다른 생각을 하시는 분이 있다면 논리적으로 저와 논쟁을 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제 존재를 치려고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대결과 반목, 분열과 폭로가 시대를 이끌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더 깊이 알고 포용하는 사람만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더 많이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되며 볼 줄 알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그저 쌓아두는 것과 다르다” 고 말한 옛 선비의 구절을 새겨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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