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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가르침
이승훈 2012년 07월 19일 (목) 00:52:36
어린 시절 저는 몸에 비해 머리가 너무 커 균형을 잘 잡지 못하는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한창 뛰어노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움직임이 둔한 데다가 겁이 많아서 조금만 높거나 경사가 심한 곳도 넘어질 게 두려워 가지 못하곤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집 안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높은 곳에 못 올라간다고 해서 어려움이나 불편을 겪은 적은 별로 없었지만, 다섯 살이 되어 유아원을 다니면서부터 인생의 첫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10분 정도 거리인 유아원을 가려면 나지막한 언덕을 하나 넘어야 했습니다. 언덕을 내려가는 길은 꽤 경사가 급한 계단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동갑내기 다른 친구들이야 산을 타는 다람쥐마냥 두 칸, 세 칸씩 뛰어 내려갔지만 저는 넘어지는 게 두려워 계단을 내려가기가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처음 며칠은 어머니께서 데려다 주셔서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혼자 계단을 내려가기 무서워서 길을 돌아서 가는 바람에 매일 같이 지각을 하고 말았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계단 내려가는 것이 무섭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싫었는데, 어머니는 당연히 빠른 길로 갈 것을 예상해서 유아원 갈 준비를 해 주셨기 때문이죠.

난생 처음 시작하는 단체 생활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던 그 시기에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난관 때문에 고민한 끝에 결국 저는 아버지께 솔직히 말씀드리고 도움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휴일 오후 쉬고 계시다가 어렵게 꺼낸 제 이야기를 들으신 아버지는 싱긋 웃으시고는 언덕으로 함께 가보자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외출은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평상시 어머니 같으면 살찐다면서 못 먹게 하는 군것질 거리도 아버지와 단둘이 있을 때는 먹을 수 있는 것도 좋지만,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걷는 것을 동네의 친구나 형들이 쳐다보는 것도 기분 좋았습니다.

그렇게 문제의 계단에 도착한 후 아버지는 두 가지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제일 아래를 내려다보지 말고 지금 있는 곳의 바로 아래에 있는 계단 한 단만 보며 내려갈 것. 또 하나는 혹시 넘어질 것 같으면 뒤에 있는 아버지가 붙잡아 줄 테니까 넘어질 걱정은 하지 말고 자신 있게 내려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겁이 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뒤에서 아버지가 지켜보고 계시다는 믿음은 어렵게 용기를 내게 했습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렇게 뒤뚱거리면서 내려가다 더럭 겁이 나서 뒤를 돌아보면 아버지께서는 인자하게 웃으시며 아까 했던 두 가지 말씀을 반복하시면서 용기를 북돋워 주셨습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마치 소나기라도 맞은 듯 온몸을 땀으로 적신 끝에 마침내 저는 난생 처음으로 계단을 혼자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단을 내려와서 드디어 땅에 발을 디뎠을 때 저는 뒤따라오시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소리 내어 울어버렸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저를 꼭 끌어안으시고는 조용히 등을 두드려 주셨습니다.

요즘도 저는 가끔 삶의 무게가 어깨를 심하게 짓누르는 걸 느끼거나 걸어온 길보다 걸어가야 할 길이 훨씬 더 많은 막막함에 지쳤을 때 몇 계단 위에서 인자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려 봅니다. 그러면 그립고도 따뜻한 느낌과 함께 그날의 계단과 아버지의 가르침이 떠올라 좀 더 자신 있게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힘이 생기곤 합니다.

단국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한림대학교 임플란트외과학 석사.
단국대학교 치의학 박사과정 재학 중.
현재 서울시 관악구 중앙동 이수백 치과에 근무하며
단국대학교 치과대학 외래교수를 맡고 있음.
2010년 인터넷신문에 '치과에서 바라 본 세상'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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