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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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은 어디인가

허영섭

2012년 08월 10일 (금) 00:27:57

사나흘 사이 날씨가 상당히 누그러진 것 같습니다. 아직 한낮의 햇볕은 피부를 파고들듯이 따갑지만 지난주에 비해서는 그래도 견딜 만합니다. 연일 섭씨 35도 안팎을 오르내리던 맹렬한 무더위로 인해 그나마 내성이 생긴 때문일까요. 입추, 말복이 지나면서 날씨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계절을 순환시키는 자연의 섭리는 역시 위대합니다.

무더위가 몰아치는 동안 실내에 걸어놓은 온도계도 더위를 먹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수은주가 30도 부근에서 고정된 듯이 멈춰 있었습니다. 혹시 고장난 것은 아닐까 싶어 냉장고에 넣어보기까지 했습니다. 냉장고 안에서는 눈금이 금방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찜통더위의 위력을 새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을 삽화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이번 여름은 인간이 자연 앞에 너무도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습니다. 날씨의 변화에도 자율신경의 작용으로 우리 몸이 균형상태를 유지한다고는 하지만 평상 체온을 웃도는 기온에서는 어차피 버티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늘에 서 있으면서도 지나가는 자동차의 배기열만으로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농촌에서 어르신들이 일사병으로 쓰러졌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려왔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논밭은 가뭄으로 다시 말라붙었고 가축들이 무더기로 폐사되기도 했습니다. 해양의 적조 현상으로 양식장이 피해를 입었으며, 개천에는 독성을 품은 녹조류가 번지고 있습니다. 4대강 사업으로 피해가 줄어든 것인지, 아니면 피해를 확대시킨 것인지 확실히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자연의 움직임 속에서 인간의 모든 노력은 한줌의 모래에 불과할 뿐입니다. 바다나 땅속에 묻혀버린 거대한 문명의 흔적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기후 변화가 가속화될 것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식물의 성장 한계선이 갈수록 북상하고 있으며, 연안을 헤엄치는 고기떼의 색깔과 종류도 바뀌고 있습니다. 한반도가 온대 기후대에 속해 있다는 교과서 내용은 조만간 고쳐지게 될 것입니다. 이번 여름의 무더위도 그러한 현상이 진행되는 부분적인 과정일 뿐입니다. 앞으로 30년 뒤에는 한반도 기온이 3도 정도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만 그 변화의 속도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을 짜증스럽게 만든 것이 어디 날씨뿐이겠습니까. 신문을 들출 때마다 누가 얼마를 해먹었다느니 하는 보도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정치개혁을 하겠다는 분들이 뒷구멍으로 공천헌금을 주고받은 파렴치한 행위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대한민국 정치의 현주소란 얘긴지요. 거기에 KTX가 난데없이 터널 한가운데 서 버려 승객들이 땀을 범벅으로 흘린 일도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 사건도 날씨에 관계없이 벌어지곤 합니다.

더구나 전국적으로 전기가 꺼져 버리는 블랙아웃의 위기까지 겹쳐졌습니다. 전력 공급이 간당간당하다고 하면서도 도대체 대책이 없는 것입니다. 책임지는 사람도 없습니다. 국민들에게 전등을 하나씩 끄라는 게 정책이라면 국가와 정부의 역할이 무엇이며, 어디에 필요하단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런던에서 들려오는 올림픽의 승전보로 짜증스런 열대야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던 것이 커다란 위안이었습니다.

이제 직장인들의 여름철 휴가도 막바지인 것 같습니다. 내주만 지나면 해수욕장의 피서객들도 뜸해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직 여름이 다 지나간 것은 아닙니다. 무더위는 당분간 더 지속될 것입니다. 늦여름 폭염도 무시할 수가 없겠지요. 지난해 블랙아웃이 몰아닥쳤던 게 9월의 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집중호우가 쏟아져 광화문 네거리에서도 바지가랑이를 걷고 지나다녀야 하는 곤혹스런 사태도 반복될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무더위의 계절이 지나간다고 좋아할 것도 아니고 무더위가 더 이어진다고 해서 실망할 것도 아닙니다. 다시 계절이 바뀌고 혹한의 대륙풍이 덮쳐와 온 세상을 얼어붙게 만든다면 오히려 이번 여름의 무더웠던 기억이 더 새록새록해질 수도 있습니다. 설령 자연의 변화로 인한 고통과 상심이 초래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일을 기약하는 하나의 성장통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불필요한 고통을 줄여가는 것이 인간의 지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박재삼 시인은 “이십오 평 게딱지 집 안에서 삼십몇 도의 한더위를 이것들은 어떻게 지냈는가 내 새끼야, 내 새끼야"('한여름 새벽에')라고 연민을 나타냈는지 모릅니다. 이성복 시인도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그 여름의 끝')라고 읊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인의 관찰이 아니라도 이제 여름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한고비를 넘기며 어느덧 가을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방충망에 달라붙어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한결 우렁차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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