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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영(息影)
-돌지 않는 풍차여...
송광섭 2012년 08월 21일 (화) 00:34:42
『莊子』「漁夫」편에 나오는 우화 한 대목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그림자가 두렵고 자기 발자국이 싫어서 이것들을 떠나 달아나려 하였는데, 발을 더욱 자주 놀릴수록 발자국은 더욱 많아졌고, 빨리 뛰면 뛸수록 그림자는 그의 몸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 자신은 아직도 더디게 뛰는 때문이라 생각하고 쉬지 않고 질주하다가 결국 힘이 떨어져 죽어버렸다.

그는 그늘 속에 쉬면 그림자가 없어지고, 고요히 있으면 발자국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人有畏影惡迹而去之走者. 擧足愈數, 而迹愈多. 走愈疾, 而影不離身.
自以爲尙遲, 疾走不休, 絶力而死.
不知處陰以休, 影處靜以息迹.)

그림자와 발자국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역정 속에 어쩔 수 없이 뒤에 그려놓고 가는 삶의 필연적 궤적입니다. 거기엔 희로애락의 찌꺼기와 놓쳐버린 허망한 꿈이나 발등을 찍고 싶은 회오(悔悟)도 있고, 누구에게 미처 갚지 못한 마음의 빚이나 버리지 못한 채 지고 사는 가증스런 탐욕 등 뒤돌아보면 지워버리고 싶은 것투성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두렵고 싫은 그것들을 떨어버리고자 뛰어 달아나보지만 달리면 달릴수록 발자국은 더욱 늘어나고 그림자는 떨어지지 않고 따라오기 마련인 이 숙명적 모순은 시지프스의 신화(The Myth of Sisyphus)이며, 이상(李箱)의 <오감도(烏瞰圖)>의 ‘무서워 질주하는 십삼 인의 아해(兒孩)’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이런 모순에서 벗어나는 일은 뛰어 도망쳐서는 이룰 수 없고 그늘 속으로 들어가 쉬는 식영(息影)으로만 가능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림자는 세상에 몸을 드러내고 거칠게 활동하면 주인을 괴롭히지만 다 내려놓고 은둔과 초월의 무위자연의 도가적 삶을 삶으로써 지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담양의 무등산 북쪽 골짜기엔 한국 가사(歌辭)문학의 표상인 많은 정자들이 모여 있는 중에 식영정(息影亭)이란 정자가 있습니다.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의 주 무대가 되는 정자입니다.

허나, 벼슬길에서 정적들을 잔인하게 척결하고 드디어 정적들에게 몰려 대사헌 자리에서 물러나 내려와 머물던 송강은 이 정자의 그늘에서 고요히 쉬지를 못하고 정자 이름과는 딴판으로 임금이 다시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임 그리워 우는 <사미인곡>을 지었습니다. 벼슬에 맛 들였던 사람이 어찌 마음을 쉬기가 말처럼 쉬웠겠습니까.

우리 정치판에서도 ‘마음을 비우고 큰 정치를 하겠다.’는 말이 가끔은 들렸고 ‘大道無門’ 같은 휘호(揮毫)하는 모습도 더러 보이더니 요즘은 그런 말잔치마저도 듣거나 볼 수가 없이 악다구니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식영(息影)은 닿지 못할 까마득한 이상이 된 각박한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세상에 살면서 문주란이 특유의 저음으로 불러 가슴을 파고드는 유행가 한 가락이나 들으며 마음을 식히는 것이 차라리 더 났지 않으랴싶습니다.

사랑도 했다 미워도 했다/ 그러나 말은 없었다./ 소낙비 사랑에는 마음껏 웃고/ 미움이 서릴 때면 몸부림을 치면서/ 말없이 살아 온 그 오랜 세월을/ 아~아~아아/ 돌지 않는 풍차여

울기도 했다 웃기도 했다/ 그래도 한은 없었다./ 눈물이 흐를 때는 조용히 울고/ 웃음이 피어나면 너털웃음 속에서/ 덧없이 지내온 기나긴 세월을/ 아~아~아아/ 돌지 않는 풍차여

“아~아~아아 돌지 않는 풍차여...” 그 후렴 속의 멎어 있는 풍차의 여운이 한결 더 마음에 와 닿는 식영(息影)의 영탄(詠嘆)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풍차가 멈추려면 바람이 먼저 자야 합니다.

1935년생. 인간의 편의를 추구해 건설기술 현장에서 평생을 보낸 토목공학도. 결과적으로는 지구를 흠집 낸 업보를 참회하는 마음으로 환경, 인류의 미래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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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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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국 (121.XXX.XXX.16)
송 선생님! ㅎㅎㅎ 참 재밌습니다. 식영정. 몇 번 가서 쉬어도 보았지만 그,런 뜻인 줄 오늘 첨 알았습니다. 송강도 사람인 이상 아니 그래서 더 인간적임을 그낍니다. 송 선생님이 지구에 낸 흠집에 대한 보상이 사람인 제게 이란 기쁨을 주는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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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4 10:4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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