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시키 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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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시키 역에서

임철순

2012년 08월 24일 (금) 00:44:33

시베리아 열차는 멎어 있습니다. 오후 1시 50분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 역을 떠난 MT3 510 모스크바행 열차는 밤 11시 30분 러시아 국경을 갓 넘어 나우시키 역에 정차했습니다. 울란바타르에서 몽골의 국경 역인 수흐바타르 역까지는 겨우 404km인데도 7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출국 심사를 받기 위해 수흐바타르 역에서 하염없이 쉬었던 이 몽골 열차는 이번엔 러시아 입국 심사 때문에 나우시키에 다시 발이 묶인 채 지루하게 출발을 대기 중입니다.

승객들은 대부분 긴 여행에 지쳐 잠을 자고 있습니다. 불쾌할 정도로 사람마다 뚫어지게 얼굴을 대조하며 여권을 가져간 세관원들은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오기 전에 개를 끈 경찰관들이 벌써 세 번이나 들어와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 물건이 없는지 객실마다 킁킁거리며 극성스럽게 뒤지고 갑니다.

4인 1실의 객실에서 나와 차창 밖을 바라봅니다. 불빛이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시야를 가로막은 화차 위로 길게 목 뽑고 서 있는 가로등은 어쩌면 저렇게도 무표정할 수 있을지, 그저 밝기만 합니다. 비 내린 뒤 달도 없고 바람도 없는 날씨. 한여름의 그 흔한 나방도 불빛을 흔들지 않고 바람도 불빛을 꺾지 않는 국경의 밤. 차창을 들여다보면 어둠 속에 떠 있는 건 내 얼굴입니다. 아니, 어둠을 들여다보면 나만 보입니다.

시베리아 열차는 무슨 생각을 하게 만드는가. 읽고 있던 책에 ‘이 긴 열차, 인간의 아픔을 기억하는 열차, 인간의 양심을 시험하는 열차’라고 끼적거립니다. 아마도 조국 잃은 사람들, 집과 땅을 빼앗기고 강제 이주 당한 사람들을 생각한 말이겠지요. ‘그리고 어디론가 가는 것이 과연 필요한지 묻는 열차, 그리고 그 모든 게 역사가 되고 환상이 돼버린 열차’라고 추가로 적어 넣습니다. 그러나 술에 취한 눈으로 다시 읽어 보면 이게 무슨 소리인지 내가 쓴 글인데도 잘 모르겠습니다.

4시간 가까이 검문 때문에 기다리는 동안 승객들은 대ㆍ소변을 참아야 합니다. 역무원은 역에 도착하기 30분 전에 이미 화장실 문을 잠급니다. 역을 떠난 뒤에도 30분이 지나야만 문을 열어 줍니다. 7월에 시베리아열차를 타고 여행했던 미국인들이 국경의 대기시간과 화장실 사용 문제로 학을 떼었는지 ‘Border Boredom’(국경의 지겨움)이라는 글을 쓴 것을 이미 보았지만, 기다리는 고통은 예상보다 훨씬 컸습니다.

우리 객차의 역무원 그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아는 몽골 아줌마는 아무리 사정을 해도 화장실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오줌을 잠그는 그녀, 승객들의 긴급함을 잘 아는 그녀, 참는 것을 가르치는 그녀, 숱한 사람들의 욕구를 잠그는 게 얼마나 유효하고 강력한지 잘 알고 있는 그녀, 못 참겠다며 난리를 치던 사람들도 결국은 어떻게든 적응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그녀. 열차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터질 듯한 생리문제로 고통을 겪던 사람들은 차량과 차량 사이의 연결통로에서 선로 쪽으로 난 틈을 통해 겨우겨우 소변을 해결합니다.

열차 화장실의 세면대는 수도꼭지의 한가운데를 거꾸로 눌러야만 물이 나옵니다. 조금이라도 물을 아끼려는 장치이지만, 사용법을 잘 알지 못해 포기하고 그냥 나오는 승객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굳이 적극적으로 사용법을 알려주지도 않습니다.

객실을 들락거리며 보드카를 마시거나 책을 들여다보거나 깨어 있는 사람들과 온갖 잡담을 다 하며 기다리다 보니 오전 2시 30분이 넘었습니다. 그제서야 세관원들이 여권을 갖고 나타납니다. 그리고 한 수 일러주겠다는 표정으로 뭔가 말을 하는데 나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 동안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지만, 이번만큼 짐작이 안 되는 문자와 풍경과 제도는 처음입니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 유럽의 여러 나라를 다닐 때는 알파벳으로 대충 짐작할 수 있었던 일들이 러시아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열차가 드디어 다시 움직입니다. 어느 시인은 아우슈비츠로 가는 열차가 “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하고 비명을 올리는 것 같았다고 썼는데, 나는 우리의 비둘기급만한 이 열차가 “나우시키, 나우시키”그렇게 헐떡이면서 언덕길을 게을리 올라가는 것 같은 환청을 듣습니다. 초원을 마구 짓쳐 내달리는 말처럼 열차에는 채찍질을 할 수 없는 것인가?

칠흑 같은 어두운 밤
화차들이 정거한 역 구내 선로 사이로
늙은 검차원 하나
침착하게 날카로운 망치를 들고
차 바퀴를 두드리며 지나간다
디젤엔진의 고동은 꿈처럼 울리고
검게 빛나는 석탄차의 석탄은
밤중의 고요를 지켜보는데
반짝거리는 것은 다만
그 사람의 간데라 불빛 하나
유개차 속에 숨죽인 쥐 한 마리
홀로 눈 떠 인기척을 넘보고
차가운 금속성의 망치 소리가
탱 하고 차륜을 울려
대륙을 횡단하는 긴 철로로 멀어져 갈 때
천 길 땅 속에 잠자던 쇠붙이의 원음을
칠흑같이 어두운 밤
늙은 검차원 하나
낡아빠진 修車譜에 적어 넣는다.

김명수의 시 <검차원>입니다. 시에 그려진 검차의 낡은 풍경은 이제 찾아볼 수 없지만, 망치로 쇠붙이를 때려 생명력을 불어넣는, 그 잡티 섞이지 않은 소리가 저 대륙 끝까지 청랑하게 울리는 그림이 눈에 보일 듯 그려집니다. 나우시키를 벗어난 시베리아 열차는 장장 26시간 만인 그날 오후 3시 40분에야 목적지인 이르쿠츠크에 닿았습니다.

박남준 시인에 의하면 시베리아 열차가 느린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제히 기립박수를 치며 손 흔드는 자작나무들의 초록빛 인사에 목청껏 기적을 불며 대답하느라 힘에 겨운 탓입니다. 또 하나는 한밤에도 푸른 눈썹을 뜨고 별빛을 길어 올린다는 바이칼호수 맑은 물가에 늙은 열차도 제 얼굴을 비춰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랍니다.

그의 작품 <시베리아 열차와 바이칼과 자작나무와>에 나타난 것처럼 철로 연변에는 자작나무 숲이 전나무 숲과 함께 끝없이 이어집니다. 러시아를 상징하는 자작나무는 사람들의 감성과 낭만을 자극합니다. 자작나무 뿌리로는 젤라토껌을 만들고 줄기로는 공예품, 몸뚱이로는 집과 숯을 만듭니다. 이처럼 쓰임새가 많은 자작나무는 바이칼 호수 주변에 사는 부리야트 족에게는 하늘과 사람을 이어주는 신목입니다. 샤먼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자작나무에 올라가 하늘과 대화를 마쳐야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많이 본 자작나무는 미끈하고 훤칠하게 잘 생긴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외면하듯 등을 맞댄 채 반대 방향으로 휘어진 것들, 둘이서 고개를 숙여 동그란 아치를 만들어내는 것들, 쌍무지개 모양을 그려낸 것들, 빗줄기가 내려 꽂힌 듯 사선으로 서서 자라는 것들, 초라한 묘소의 돌에 새긴 영정과 꽃 몇 송이를 비로 가려주듯 몸을 굽히고 선 것들이 더 잘 눈에 들어왔습니다. 설해 때문인지 몸뚱이가 무참하게 꺾인 채로 서 있는 자작나무도 많았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사람 구경, 나무 구경을 참 많이 했습니다. 허술하고 잘못된 체계와 제도에 봉사ㆍ복무하는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일상의 삶이 세상 전부입니다. 사람들은 어쨌든 잘도 저마다 다르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나무들도 잘도 저마다 다르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같은 사람, 같은 나무는 하나도 없습니다. 국경을 넘는 것은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는 일이지만, 이 세상 어디든 미끈하고 훤칠하지 않은 게 더 많다는 걸 알게 됩니다.

임헌혁 (121.XXX.XXX.16)

서정적이며 낭만적이기도 한 분위기가 좋았고, 러시아, 몽골 국경 관리들의 경직된 자세를 잘 전달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한가지만 의견을 말씀드리면,글 말미에 과거 공산주의 국가였던 나라에는 여행을 자제하라고 권하는 내용이 첨가 되었으면 좋았을듯 합니다./ 도대체 러시아란 나라에 두번 가 봤지만 그놈의 나라 공무원 (자식)들은 친절이란 개념이 아예 없더란 말입니다.특히 동양인들에 대한 비하의식이 확연히 느껴질만큼 노골적으로 불친절하게 대하는데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그런 나라에 무엇때문에 아까운 외화를 갖다 주어야하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고로 하셨다가 다음에 러시아 여행에 대한 글을 쓰실때면 꼭 우리나라 여행자들이 참고 할 수 있도록 꼭 설명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더욱 건승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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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6 04:4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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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리 (121.XXX.XXX.16)

고생하셨씁니다. 시베리아에 대한 동경은 현실과의 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작나무의 숲과 전나무 숲과 눈의 들판과 그런 낭만이 있는 곳만은 아닌 것,
닥터 지바고의 사랑을 그려보는 낭만은 그저 영화 속에서만?
그래도 그게 또다른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사람사는 모습, 배우는 게 있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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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5 07: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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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정 (121.XXX.XXX.16)

보내주시는 글 잘 받아보고 있습니다. 그 멋진 글을 무상으로 이렇게 편하게 받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행복하기도하면서 한편 죄스럽기도 합니다. 글 쓰시는 분의 감동과 성의를 10분지 1, 100분지 1 이라도 느끼고 싶어 다시 읽어 봅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서울 서초동 오규정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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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5 07: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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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장춘 (121.XXX.XXX.16)

마치 같은 기차에 함께 타고 여행하는 것 처럼 착각하게 하는 기행문입니다.
더우기나 그런 것이 1993년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로 된지 얼마 안된 시기에 며칠씩 몇 시간씩 대륙철도를 타고 오고 가고 하는 여행을 할 때마다 불편함과 승무원들의 엄격함이 배어나는 경험을 한 적이 있어 그러합니다.
뒷 부분에 가서야 객관적인 묘사가 있어 한 숨 푹 내쉬었습니다.
언제 돌아 오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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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5 07: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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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애 (121.XXX.XXX.16)

시베리아 기차에 함께 승차한 느낌입니다. 지난 여행에 장시간의 기차를 탄 탓인지도 모르겠네요. 사람들의 표정, 기차의 냄새, 창밖의 풍경.. 아마도 시베리아의 모습을 배경으로 쓰셨지만, 저는 제가 탄 기차의 모습과 풍경들을 상상하네요.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으로 사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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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5 06:5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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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121.XXX.XXX.16)

감사합니다. 우리나라 역에도 좋은 시가 많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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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5 06:5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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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Ja.Lim (121.XXX.XXX.16)

저도 이번 여름에 몽골을 통해 바이칼 호수로 가서 부리야트 족을 방문해보고 싶었는데 같이 가기로 한 일행이 뒤로 빼는 바람에 내년으로 넘겨야 겠어요….. 좀 일찍 안 간다고 통보해 왔으면 혼자라도 출발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날씨가 너무 추워 안된대요…

부리야트족은 우리 조상 부여의 후손이래요… 그들의 샤머니즘, 장례풍속 등 좀처럼 바뀌지않는 민족 고유의 풍습이 우리 고유의 풍습과 흡사하다네요…

주말 잘 마무리하지고 영차 영차 새로운 마음으로 다음주를 준비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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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4 10:5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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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완 (121.XXX.XXX.16)

임주필, 좋은 여행하셨네요. 만나면 더 상세하게 여행기 좀 들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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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4 10:5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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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국 (121.XXX.XXX.16)

오늘 글에는 의견을 달지 않을 수 없는 묘한 마력이 있습니다. 산문이 시처럼 잔잔히 아니 그러면서 더 깊숙히 마음 속까지 파고 듭니다. 저도 지지난주 몽골을 여행하고 왔기 때문일까요. 선생님이 묘사한 국경의 밤 풍경은 마치 유체 이탈을 한 사람의 시각 같고, 술에 취한 눈이지만 어쩜 그렇게 속속들고 감상적인지 3D 입체영화에 심령술까지 더한 듯합니다. 박남준 님과 김명수 님 글 인용도 정말 좋습니다. 자작나무 얘기에서 그 쓸모 중 하나가 얇게 벗겨지는 껍질에 편지를 써 보내면 일이 성사가 잘 된대서 엣 선배들은 일부러 자작나무 껍질을 구해다 연애편지를 써보내기도 했다는 낭만의 원조격인 애길 들었는데 이것까지 들어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삼라만상 모두가 다 저마다 다르게 살아간다는 이것 하나는 똑 같은 거겠지요. 상큼한 가을 기운과 함께 좋은 글 차암 자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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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4 10: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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