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의료체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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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낙

2012년 08월 29일 (수) 00:32:20

근래 들어 우리 사회가 의사를 초인간적 존재로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난 7월 초부터 정부에서 강행한 포괄수가제(包括酬價制)가 그 예 중 하나입니다. 포괄수가제란 의료 행위별로 수가를 달리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제왕절개술처럼 다양한 원인에 의한 수술의 경우를 포괄적으로 묶어 동일 산정 수가만 적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른 절감 효과는 25%에 달한다고 합니다. 환자의 시각에서는 부담이 일단 적어진다니 그럴싸할 것입니다. 그만큼 의사에게 돌아가는 것이 축소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엉뚱한 화(禍)는 환자에게 돌아갈 수 있기에 걱정입니다.

포괄수가제도에는 아주 심각한 논리적 함정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의사는 생명 윤리 의식이 여느 직종의 전문인보다 높다고 믿습니다. 언제든 잠자리를 박차고 나와 응급실로 향하는 것이 의사의 뇌리에 깊이 박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윤리 도덕적 측면에서는 다른 분야의 전문인과 다를 바 없다고 봐야 합니다. 이런 전제 아래 포괄수가제를 생각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의료시술 행위에 고정된 금액만 포괄적으로 받는다면, 의사는 굳이 고가의 질 좋은 약을 쓰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한정된 수가에 수익을 맞추기 위해 가능한 한 저가의 의료 소모품으로 눈을 돌릴 수 있습니다. 결국 피해의 부메랑은 환자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사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을 가진 보통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탁상행정의 본보기는 최근 의료계를 강타하고 있는 ‘응당법(응급실전문의당직법)’ 입니다. 세심하고 꼼꼼한 준비 과정이 결여된 이 같은 행정 지시로 의료계는 심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는 요컨대 환자가 급히 병원 응급실을 찾아갔을 때 각 진료 과목의 전문의가 대기하고 있다가 응급 상황에 대처하라는 취지의 시행령입니다. 일견 급히 응급실에서 도움이 필요한 환자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제도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또 다른 행태의 포퓰리즘에 바탕을 둔 행정 지시라는 것입니다. 현재 국내 병원이 처한 상황을 깊이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응급실 담당 전문의와 달리 모든 임상과의 당직은 전문의 과정을 밟는 수련의의 몫입니다. 전문의는 이른바 ‘뒤에서’ 전화 당직만 합니다. 이 역시 전 세계 병원계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 ‘응당법’은 응급실을 위해 각 임상과 전문의가 비상 호출 시 1시간 이내에 응급실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지시는 쉽게 할 수 있어도 현실감과는 거리가 한참 있습니다. 그 한 예로 국내 교통 상황에서 1시간의 거리는 아주 피상적일 숫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어겼을 때 당직전문의가 의료송사에 얽힐 가능성조차도 고려하지 않은 조치입니다. 권역 혹은 지역응급의료센터가 개설된 국내 대학병원에는 교수가 200~300명 넘게 있어 수치상으로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임상 전문 분야별로 계산하면 교수진(전문의)이 적게는 1명만 확보된 임상과도 있어 현실적으로 실행하기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중소 병원의 상황은 열악하기가 그지없습니다. 그러니 지방 소재 중소병원에서는 응급실 운영을 포기하겠다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전문의가 초인간적 체력을 지니지 않은 한 어떻게 이 무리한 행정지시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전문의가 당직을 서야 하는 병원을 그만두고 나가는 의사들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3D 업종’이 아닌 임상과에 의대 졸업생이 몰리는데, 그 가장 큰 동기는 바로 고된 당직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편하다고 생각해 들어왔건만 근무 여건이 너무 힘들어 전문의 과정에서 도중하차하는 수련의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참으로 민망한 현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대형 병원의 일반외과, 신경외과, 흉부외과, 산부인과, 응급의학과에서 전문의 지망생을 한 명도 뽑지 못하는 경우가 수년 전부터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는 현상입니다. 이처럼 국내 의료 제도는 붕괴되기 시작한 지 오래됩니다. 그런데도 ‘남의 사정’인 양 정부 및 유관단체가 바라보고만 있을 뿐입니다.

의사는 얼마든지 혹사할 수 있는 초인간적 힘의 소유자도 아니고, 사회인으로 특별히 윤리적이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 100시간 근무에 시달리는 젊은 수련의들이 “잠 한번 실컷 자봤으면…” 하는 소박하지만 강하게 절규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여러분의 의료 체계가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는 무서운 경고음이기도 합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시급한 대책이 절실히 요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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