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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원하면 다 알려주겠다?
박상도 2012년 09월 11일 (화) 01:31:17
나주 성폭행 사건의 피의자 고종석이 검거되었습니다. 현행 법 제도에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있어서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 형사 피의자를 무죄로 추정하여 인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범인(犯人)’ 즉,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는 호칭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비롯한 신상을 공개하는 것도 불법입니다. 그런데 이런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인간에게 과연 인권을 허용해야 할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피의자의 신상공개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1993년 영국 리버풀에서 희대의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피해자는 제임스 벌거(James Bulger)라는 두 살 난 아이였고 범인은 놀랍게도 열 살짜리 어린이 두 명이었습니다. 로버트 톰슨(Robert Thompson)과 존 베나블스(Jon Venables)라는 이 두 소년은 제임스 벌거가 쇼핑몰에서 엄마와 잠깐 떨어져 있는 사이 아이를 데리고 4km 떨어진 철로 변까지 발로 차면서 질질 끌고 가서는, 벽돌로 얼굴을 가격하고 10kg짜리 쇠몽둥이(정확하게는 레일 이음판)로 머리를 찍어내려 두개골이 열 군데나 골절되어 사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열 살짜리 소년들의 끔찍한 만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제임스 벌거가 사고로 죽은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철로에 시체를 매달아 지나가던 열차가 두 동강을 내게 했습니다.

이 사건은 영국은 물론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의 자세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열 살이 되면 피의자를 법정에 세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판이 끝나기 전에는 법정에 선 소년의 실명이나 가족관계를 보도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결국 영국 언론은 이 사건에 대해 소년 A, 소년 B로 보도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보도 태도는 달랐습니다. 피의자의 이름과 이들의 개인사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한 것입니다. 영국 언론은 법의 권위에 충실하였고 미국 언론은 독자의 관심에 충실하였습니다. 어느 쪽이 더 옳은 결정이었을까요?

2001년 6월 18세가 된 두 소년이 사면을 받아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세상은 다시 이 엽기적인 살인사건에 관심을 보였고 로버트 톰슨과 존 베나블스에게는 보복살해의 위험 때문에 새로운 신분증과 여권이 발급되었습니다. 영국 법원은 언론이 두 소년의 이름과 주소 그리고 사진을 게재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영국 밖의 언론들은 영국 법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언제까지 숨어서 지낼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죗값을 치르고 나왔지만 신분이 노출된다면 그들은 평생 죄인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여기에도 찬반의 의견이 나뉘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세간의 주목을 받은 범죄는 두 소년의 가족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두 소년의 어머니는 공공장소에서 모욕과 폭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로버트 톰슨과 존 베나블스의 가족들은 새로운 신분증을 발급받고 이사를 가서 신분을 숨기고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신분이 알려져서 세인의 질타를 다시 받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늘 갖고 살고 있다고 합니다.

고종석의 부모와 가족도 어디 사는 누군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하면 알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자식이, 동생이 저지른 끔찍한 범행으로 동네에서 고개를 못 들고 살고 있을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연좌제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잘못 키운 죄로 사회에서 가해지는 매도와 탄압은 인권 침해의 소지가 다분히 있습니다.

그런데 피해자와 그 가족의 입장에서 볼 때 피의자 가족의 인권을 운운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피의자에 의해 인권이 철저하게 유린된 어린 자식을 생각하면 피의자와 그 가족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을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언론은 피해자 가족에게도 가혹했습니다. 피의자와 PC방에서 만나 서로 알고 지내던 엄마는 사건이 있던 날 새벽 2시 반쯤 집에 와서 잠을 잤다고 합니다. 주변의 얘기로는 피해 아동의 엄마는 PC방 폐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였으며 사건 당일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한 술 더 떠 피의자 고종석은 원래는 피해 학생의 언니를 범행 대상으로 노렸다고 하더군요. 이 모든 정보가 여과 없이 대중에게 공개됐습니다.

아이의 가족은 이제 얼굴을 들고 다니기 어렵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주변에서, “엄마가 새벽까지 집밖에 있으니 그런 일이 생겼지…”, “원래는 큰 딸이 범행 목표였다며? 동생이 대신 변을 당했구먼..” “어떻게 애를 업어가는데 모르고 잘 수가 있지? 애 아빠가 허구한 날 술을 마시고 자니까 외부에서 침입을 해도 모르지” 이렇게 수군거리지 않겠습니까? 피해자 가족은 다시 한 번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취재한 모든 정보를 보도하는 것은 독자의 관심에 충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쪽의 요구를 맞추면 다른 쪽은 소홀해집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사건의 보도는 단순한 사실의 전달이라도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매체간의 보도 경쟁보다는 피해자의 인권을 우선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더 나아가서는 피해자 가족에게 사회적 비난이 쏟아질지 모르는 사실의 보도는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아동 성폭행이나 살해사건의 경우 여러 매체가 보도의 수위를 조절하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각 매체의 뉴스 종사자가 참고하는 윤리규정 즉, RTNDA Code of Ethics (RTNDA; Radio Television Digital News Association)가 있습니다. 아래는 이번 사건과 연관이 있는 그들의 윤리 규정 원문입니다.

l Treat all subjects of news coverage with respect and dignity, showing particular compassion to victims of crime or tragedy.

l Exercise special care when children are involved in a story and give children greater privacy protection than adults.

‘참극의 희생자에게 각별한 동정심을 보여야 하며 뉴스의 대상을 존중하고 그 품위를 지켜주어야 한다.’ ‘아동이 포함된 사건의 경우엔 특별히 신경을 써서 보도하고 어른보다 더욱 더 아동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여야 한다.’로 번역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런 통일된 윤리규정은 없습니다. 신문사와 방송사마다 자체적인 보도 지침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위와 유사한 조항으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다’는 조항이 거의 모든 언론사마다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뉴스의 대상을 배려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매체가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가족사를 그대로 공개해서 그들의 품위를 떨어트렸습니다.

판결 전에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하기 시작한 것은 강호순 사건부터였습니다. 당시에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한 배경은, 우선 국민들의 거센 요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피의자의 자백과 사건의 물증이 나오면서 피의자의 유죄가 명백해졌습니다. 판사의 판결이 나기 전이었지만 명백한 유죄가 인정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언론사들은 자체적인 판단으로 ‘이제는 얼굴을 공개해도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물꼬가 터지고 나니 유사한 범죄에 피의자의 사진이 판결 전에 공개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지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공개 이후의 부작용에 대한 책임은 과연 누가 지게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언론은 ‘국민의 알 권리에 충실했을 뿐이다’라는 논리 뒤에 숨을 수 있습니다만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낱낱이 공개된 피의자 가족과 피해자 가족들은 마치 국민 앞에 벌거벗고 서 있는 것 같은 모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피의자 가족에게 새로운 신분증을 주고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서 살게 하였습니다만 우리에겐 그런 배려조차 없습니다. 피해자와 그 가족 역시 사건 이후 육체적 정신적 치료를 위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관심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잘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언론의 보도는 일단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대책과 사후수습 문제는 외면하기 일쑤였습니다. 왜냐하면 어렵고 복잡하고 재미없기 때문입니다. 말초적인 스토리에만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비슷한 사건은 또 일어나고 사건의 주변인물들은 보도과정에서 상처를 입는 일이 재발됩니다.

철학에서 윤리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정언명령’에 의하면 ‘정언’이란 무조건적이고, 정상 참작의 여지가 없고, 예외 없음을 의미합니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기 때문에 극단의 조건에서도 실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윤리는 일시적 분위기에 영합해서 쉽게 합리화되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민이 원하니 다 알려주겠다.’는 원칙은 상당히 민주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속의 함정은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건의 보도에 있어 누구에게 충성할 것인가?’에 정답은 없습니다.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양심은 우리가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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