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서 바라본 추석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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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에서 바라본 추석 풍속

허영섭

2012년 10월 02일 (화) 03:24:22

추석날 저녁, 바다 건너 대만 땅에서 바라본 보름달도 휘영청 둥그렇기만 했습니다. 시차만큼이나 서울에서보다 한 시간쯤 늦게 떴을 뿐입니다. 우리가 빌려온 용어겠지만 중추절(中秋節)이라는 한자 이름부터가 똑같습니다. 식구들이 함께 모여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는 모습도 비슷합니다. 풍성한 수확의 계절을 맞아 조상님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하는 것은 농경문화를 이어온 모듬살이 사회에서는 어디서나 공통된 현상이겠지요.

다르다면 우리의 송편 대신 월병(月餠)을 먹거나 달에는 계수나무에 옥토끼가 아닌 상아(嫦娥)라는 선녀가 산다고 생각하는 정도입니다. 대만의 추석 풍속은 같은 문화적 전통을 지닌 중국과도 또 차이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원주민 문화가 녹아들었을 테니까요. 대만에서도 역사가 가장 오랜 타이난(臺南) 시 정부가 한국 언론인들을 추석 연휴를 기해 초청한 것도 자기들만의 고유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생각에서였을 겁니다.

더욱이 올해는 추석 이틀 전이 ‘스승의 날’이어서 콩쯔(孔子)에 대해 제사를 드리는 석전대제(釋奠大祭) 모습을 가까이 구경할 수도 있었습니다. 대만에서는 해마다 9월 28일을 ‘스승의 날’로 기념하고 있는데, 콩쯔의 탄신을 기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뜻이라고 합니다. 라이칭더(賴淸德) 시장을 정헌관(正獻官)으로 삼아 문화·교육계의 모든 원로들은 물론 어린 학생들까지 두루 참여한 이 행사는 기억에 남을 만했습니다.

새벽 5시부터 제례가 시작한 것도 그렇지만 소, 돼지, 양을 한 마리씩 희생물로 바쳐놓고 진행된 엄숙한 분위기가 무엇보다 그러했습니다. 물론 연주되는 문묘제례악이나 악기의 편성은 우리의 경우와 거의 비슷하다고 합니다. 전국적으로도 같은 행사가 동시에 열렸습니다. 하지만 타이베이(臺北)에 수도가 정해지기 전에는 대만의 중심 도시였다는 점에서 타이난은 콩쯔 숭배를 포함한 전통적인 분위기를 가장 자랑하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추석 풍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만에서도 추석은 춘절(春節)이라고 불리는 설날과 함께 중요한 명절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으면서도 연휴가 아니라 하루로 그치고 있습니다. 더구나 올해는 추석날이 일요일과 겹친 탓에 명절 분위기가 들뜨기보다는 대체로 차분한 편이었습니다. 그나마 길거리에서 가끔씩 폭죽이 터지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와는 달리 민족의 대이동 현상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추석 당일만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으므로 멀리까지 움직일 생각들을 안 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추석에는 대체로 성묘도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성묘는 청명절(4월 4일)에 하는 게 보통입니다. 특히 청명절은 다음날의 ‘부녀자의 날’ 공휴일에 이어짐으로써 추석 때보다는 오히려 멀리 움직일 여건이 갖춰지게 됩니다.

설날이나 청명절 연휴의 경우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인다고 해도 대만의 교통 여건은 우리보다 한결 수월한 편입니다. 북쪽의 타이베이에서 남쪽의 카오슝(高雄)까지 고속철도로 1시간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으니까요. 일반 열차편으로는 4시간 정도,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달려도 대략 그 정도인데 설혹 체증이 빚어진다고 해도 한두 시간밖에는 더 지체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이런 분위기는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오랜 풍속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추석에 앞선 음력 7월을 중원절(中元節)이라 하여 한 달 내내 영령들의 원혼을 달래는 의식을 치르고 있으니까요. 특히 7월 15일과 29일에는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마을 단위로 성대하게 공동제사를 지내기도 합니다. 건축 공사장이나 과수원, 양식장 등에도 무탈을 비는 제사상이 차려지게 됩니다.

예로부터 여름이면 전염병이 나돌고 어린이들은 방학을 맞아 물놀이를 하다가 자칫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자주 일어나게 됨으로써 귀월(鬼月)이라고 여기는 때문입니다. 이처럼 7월 한 달을 제사 분위기에 휩싸여 지내는 데다 시기적으로 추석이 끝나면 곧바로 건국기념일인 쌍십절(10월 10일)이 다가오기 마련이므로 상대적으로 추석 명절을 차분하게 보내게 됐다는 뜻이지요.

대만은 아열대성 기후대에 속해 있으므로 추석 무렵에도 날씨는 여전히 더운 편입니다. 타이난의 경우 10월로 접어든 요즘에도 한낮의 평균 기온이 섭씨 30도 안팎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니까요. 벼농사로 따진다면 2월초에 파종한 전반기 농사가 끝나고 후반기 농사가 시작되기 직전의 무렵입니다. 이제 볍씨를 뿌리게 되면 내년 1월께나 추수하게 되겠지요. 물론 3모작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으므로 일률적인 현상은 아닙니다.

지난날 대만의 농촌에서는 마당에 곡식 낟알을 널어놓았다가 추석을 맞을 무렵이면 거둬들이곤 했는데, 지금은 이런 풍경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게 됐습니다. 벼베기에서 탈곡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기계로 처리하게 된 때문이겠지요. 벼를 재배하는 논 면적 자체가 계속 줄어드는 데다 그에 따라 쌀 생산도 크게 감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은 대만도 일부 고급 품종에 있어서는 일본에서 쌀을 수입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추석날이라도 날씨가 덥기 때문에 대부분 주민들이 저녁이 되어서야 명절 분위기에 동참하는 것도 이해할 만합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마당에 널찍하니 자리를 마련하고는 식구나 이웃들끼리 둘러앉아 보름달을 바라보며 월병을 먹거나 차를 마시는 것입니다. 이 무렵 냇가에 피어나는 흰색의 들꽃을 몇 줄기씩 꺾어다 놓고 달놀이를 즐기면 더욱 분위기가 살아나기 마련이라지요.

특히 월병은 중화권 추석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합니다. ‘달떡’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직장에서는 추석을 맞아 직원들에게 월병 한 상자씩을 선물로 나눠주는 게 보통이랍니다. 출가한 딸이 친정집에 월병을 선물하는 풍습이 널리 전해지기도 합니다. “딸이 없는 집안은 추석 월병을 얻어먹지 못한다”는 속담이 나도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입니다.

같은 월병이면서도 대만식은 대륙과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떡의 껍질이 얇고 속에는 주로 돼지고기를 넣는다고 합니다, 색깔도 대체로 흰색을 띄게 마련이랍니다. 그러나 요즘은 대만에서도 대륙이나 홍콩에서 유행하는 광둥(廣東) 스타일이 퍼져가고 있습니다. 계란이나 팥, 과일 등으로 속을 채우며 모양도 사각형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되는 게 광둥식의 추세입니다. 젊은 세대들은 새로운 스타일을 좋아하고 있지만 어른들 세대에서는 이런 변화를 은근히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도 합니다.

최근 젊은 부부들 사이에 갑자기 유행하는 바비큐 풍조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략 10년 전쯤부터 추석날 저녁이면 집집마다 바비큐를 즐기고 있는데, 이런 풍조가 전통적인 분위기를 해친다며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추석이 가까워지면서 상점에서는 고기를 굽는 틀에서부터 음식 재료에 이르기까지 아예 묶음으로 판매하고 있으며 집집마다 이를 장만하는 게 중요한 일이 되고 말았으니 유행을 거스른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이 바비큐 요리는 주로 남자들이 맡고 있어 주부들로서는 마다할 까닭이 없겠지요.

폭죽놀이에 대해서도 환경오염을 우려하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대만에서는 추석을 포함한 명절 때는 요란하게 폭죽을 터뜨리거나 초롱불을 배에 매달아 강에 띄워 보내는 전통놀이를 즐기고는 했습니다. 초롱불과 함께 소원을 적은 쪽지를 함께 띄워 보내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풍습도 조만간 자취를 감추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추석 명절을 쇠는 모습에서 대만 국민들이 전통 보전과 현대적 유행 사이에서 고민하는 현상을 살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추석 풍속에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닐 것입니다. 어느 분야에서나 마찬가지이겠지요. 결국 이런 과정에서 노출되는 문화·세대·지역적 갈등을 조화롭게 해소하면서 지킬 것은 지키고 발전시킬 것은 발전시켜 나가는 게 어느 민족에게나 당면한 과제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