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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색의 이름을 부르다
안진의 2012년 10월 25일 (목) 00:52:47
얼마 전 전통색에 관한 출판기념 강연회가 있었습니다. 강연회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강색(鋼色), 추향색(秋香色), 노홍색(老紅色), 다자색(多紫色), 파색(皤色), 도홍색(桃紅色), 운백색(雲白色), 지백색(紙白色) 등 들어본 듯은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색명의 염색 한지가 길게 복도 벽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핑크, 울트라마린, 오렌지, 로즈, 코발트블루, 그레이, 화이트 같은 색명은 색한지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녹록하진 않았어도 한가함과 여유로움을 즐겼던 선조들의 품위가 한지에 곱게 물들어 있고, 그것을 지칭하는 색명을 들여다보니 전통색명은 시(詩)처럼 아련한 시간여행을 보내주는 것 같습니다.

강색(鋼色)이라 하면 홍화를 세 번 물들인 색으로 임금의 집무실 어좌를 장식했던 위세가 강한 붉은색입니다. 노홍색(老紅色)은 글자 그대로 늙은 홍색인데 지금 같이 단풍이 들어가며 낙엽이 떨어질 때를 기다리는 가을날, 감나무 밤나무의 잎과 같은 색입니다. 다자색(多紫色)은 찻잎을 볶아 가공하여 물에 잘 녹인 차의 색입니다. 궁중에서 사용되던 언어에서는 다자에 숭늉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아마도 단맛이 더욱 나도록 누룽지를 제대로 끓여낸 숭늉색을 의미하는가 봅니다.

도홍색(桃紅色)은 복숭아꽃색이라는 의미로 여성적인 느낌이 들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이 한껏 멋을 부려 입었던 색입니다. 추향색(秋香色)은 가을의 향기라는 뜻으로 추수 즈음 농가의 누렇게 익은 곡식들처럼 풍성함과 넉넉함을 주는 노르스름하면서도 붉은 색을 이야기합니다. 염색이나 원료를 의미하는 색이 아니고 다산시문집을 비롯한 시집들에서 가을 분위기를 묘사할 때 사용했던 관념적이며 서정적인 색명입니다.

설백색(雪白色)은 눈이 온 광경을 표현하는 색이며, 자주 먹는 백설기의 색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운백색(雲白色)은 흰 구름의 색을, 유백색(乳白色)은 백자의 색을, 지백색(紙白色)은 흰색 한지의 색을 말합니다. 파색(皤色)은 흰 머리칼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파파할머니라 하면 흰 머리칼이 있는 할머니가 됩니다. 호호백발 할머니의 호색(皓色)은 검은색이 하나도 없는 완전한 백색입니다. 파파할머니보다는 호호할머니 연세가 더 높다는 것이 됩니다.

지금은 난해하지만 이러한 색명은 오래 동안 우리 선조들이 써왔던 색명입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 세종 22년 10월 30일자에는 임금도 얼마나 색명을 정확하게 알고 능숙하게 사용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있어 흥미롭습니다. 즉, 푸른 빛깔의 관복으로 염색하는 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 다른 색들로 대체하면 어떻겠냐는 신하의 질문이 있자 세종이 말하기를,

“옥색은 국초에 숭상하던 것이나 고려 사람이 흰옷을 입기 좋아한다는 말이 중국사전에 보이고, 토황색 옷은 중국에서 흉복으로 여기며, 심홍색 옷은 여자의 옷에 가깝고, 남색 옷은 왜인의 옷과 유사하니 불가하다. 푸른 빛깔의 염료가 비록 값이 비싸다 하더라도 군사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미 갖추었으니 어찌 어려울 것이 있겠는가. 더구나 항상 입는 옷도 아닌데 어떠랴. 초록색(草綠色), 다할색(茶割色), 유청색(柳靑色) 옷은 입어도 좋으나 그것은 다시 의논하도록 하라.”

여기서 다할색은 정향나무, 참나무 등으로 염색하여 만드는 것으로 밤색과 비슷한 색입니다. 지금의 컬러리스트 못지않게 색채와 색명에도 해박했던 세종대왕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처럼 색명이라는 것은 색을 이름 지어 부르는 자연스런 일이지만, 이러한 전통색명의 사용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색명이 없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감성을 지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전통색명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 붙여질 대상이 존속해야만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통적 매체들이 전승되지 못하다 보니 색명도 오갈 데가 없어집니다. 일본에서는 전통의상을 통해 전통색명을 주로 사용하게 되는데, 전통 의상의 보급률이 1960년대는 15%였지만 그 이후 급격히 감소해 1980년대 이후에는 2%에 머무르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의 전통의상의 쇠퇴가 곧 전통색명 사용의 빈도수를 감소하게 한 것처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지 제작이 전통색명을 보급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용빈도가 줄어들고 점차 우리의 감성이 서양화되어 가고 있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것에 익숙해지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흡수성이 좋은 한지에 먹과 붓을 이용하여 그리고 쓰는 것, 한지에 물을 들이고 이름 부르는 것. 조각보를 만들어 보면서 전통색명과 친근해지는 것, 이러한 것들은 암기하듯 외워서 익히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즐겨하는 공기놀이의 공기도 청, 황, 적, 백, 흑 다섯 가지 색으로 만들어 이름 부르듯, 유년시절부터의 놀이처럼 생활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으로 옛 이름을 부르자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 사용이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들이 있기에 추리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그 안에서 지금 살아 숨쉴 수 있는 지혜롭고 아름답고 정교한 전통색의 이름을 찾아, 보듬고 이름 부르는 것은 우리의 숨결과 함께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가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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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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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화 (183.XXX.XXX.149)
이렇게 아름다운 전통색명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답변달기
2015-11-13 12:31:21
0 0
김윤옥 (110.XXX.XXX.229)
'색명이 없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감성을 지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공감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감성으로 우리만의 전통을 잃지않고 가꾸어 나가는 것만이 세계 적인 것일 것입니다.
답변달기
2012-10-26 18:04:34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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