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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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 할 때···

김홍묵

2012년 10월 30일 (화) 06:25:14

‘정치란 피 흘리지 않는 전쟁,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요즘 자칫 피를 튀길 듯한 막말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불구경과 싸움구경만큼 재미있는 게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사자후를 내뿜는 정치판에 피를 부르고 살인을 저지를 것 같은 촌철(寸鐵)이 날아다니니 국민은 되레 불안하기만 합니다.

섬뜩한 발언은 역시 국회에서 나왔습니다. 서른한 살 김광진 의원(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청년특보실장)은 아흔두 살의 군 원로 백선엽 장군(예비역 육군대장)을 “민족 반역자”라고 매도했습니다. 지난 19일 국방위 국정감사에서 그는 백 장군이 일제 강점기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간도특설대 소위로 근무하면서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주장을 근거로 “잘못된 과(過)를 가지고 있는 민족 반역자가 대한민국 국군 지도자로 설 수 있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김 의원은 올 1월 새해 소원을 묻는 물음에 ‘명박급사’(明博急死)라고 리트윗했다고 합니다. 지난해 11월에는 보수단체인 어버이연합 회원들을 향해 “나이를 처먹었으면 곱게 처먹어. 당신 같은 어버이 둔 적 없어. 분노감에 욕이 턱밑까지 차오르지만 개 쓰레기 같은 것들과 말 섞기 싫어서 참는다”라고 트위터에 글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문제가 커지자 그는 "국회의원이 되기 전 농담 수준에서 한 말"이라고 발뺌했습니다.

문재인 후보 캠프의 제윤경 공동선대위원장은 작년 11월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나라를 밑천 삼아 재테크하는 도둑놈”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녀는 또 “탐욕에만 눈이 먼 대기업을 대변하는 한나라당은 기생충”, “성희롱이나 하는 인간들(검찰)은 부끄러움도 죄의식도 없는 사이코패스 범죄자”라고 욕했습니다. 같은 무렵 한미 자유무역협정 통과 때는 “뭐 이런 개떡 같은 나라가 있나”고 분노를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젊음의 특권인 용기인지, 뼛속까지 스며든 이념의 표출인지, 단순한 농담인지, 아니면 가는 말이 험해야 오는 말이 곱다는 경험에서인지 듣기조차 민망하고 아연해집니다. ‘개’ ‘돼지’ 같은 접두어나 ‘연’ ‘놈’ ‘새끼’ 같은 접미어는 욕도 아닌 평상어가 되었나 싶어 망연해집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도 분명 ‘국민’을 위한 쓴소리였다고 강변할 것입니다. 그에 반하는 편의 반론도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번엔 김정은의 버르장머리를 확실히 고쳐야 한다. 북이 NLL에서 또 도발하면 적의 해안포 기지를 폭격하라.”(9월 26일 국민행동본부) “역적모의를 수사하라! 대한민국의 생명선인 NLL포기 음모를 규탄한다.”(10월 24일 국민행동본부) “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 매도발언을 규탄한다, 김 모 의원은 즉각 사죄하고 의원직을 사퇴하라.”(10월 25일 재향군인회·성우회) “서울시장 박원순이 서울탈환의 역사적 의의를 부정했다.”(10월 5일 해병대) 저변에 깔린 것은 국가와 국민의 이름으로라는 절규입니다.

당연히 대선전의 세 후보가 내세우는 슬로건도 국민입니다. 맨 먼저 스타트한 박근혜 후보는 후보수락 연설에서 “국정의 패러다임을 국가에서 국민 중심으로 바꾸겠다”고 못박았습니다. 문재인 후보는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내걸었습니다. 사람이란 도롱뇽도 돌고래도 아닌 국민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안철수 후보는 “변화의 열쇠는 국민에게 있다”며 “야권 단일화 문제도 정치 개혁도 국민 동의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과연 국민은 무엇일까? 국어사전에는 ‘한 나라의 통치권 밑에 같은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우리 속담에 ‘민심이 천심’이라고 했듯, 서양에서도 ‘정부는 국민보다 더 현명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떤 정부든 그 나라의 국민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표현과 일맥상통합니다. 그 국민은 국가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정부의 지배를 받는 객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국민에 대한 인식은 동양에서는 수동적, 서양에서는 능동적 위치에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치란 바로잡는 것’(政者正也: 지도자가 바른 모범을 보이면 백성도 바르게 된다)이라고 한 공자는 “군자(지도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백성)의 덕은 풀과 같아, 바람이 불어 풀 위로 지나가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라고 갈파했습니다. 지도자가 선(善)을 실천하면 백성도 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취임연설에서 “국가는 국민의 것이다. 국민이 정부에 염증을 느끼게 되면 그들은 언제든지 그것을 개선할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행사하거나 전복시킬 수 있는 혁명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영어의 관용구에서도 as people go(일반적으로 말하자면), go to the people(정치 지도자가 국민의 신임을 묻다)처럼 국민(people)이 주인이라는 의식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국민을 위한다’는 말의 진위는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까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맹자의 지언(知言)에 대한 해석이 다소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한 쪽으로 치우친 말[詖辭]은 무엇을 감추고 있음을 알 수 있고, 허황된 말[淫辭]은 그의 마음이 어디에 빠져 있으며, 부정한 말[邪辭]은 어떤 점이 정도를 벗어나 있고, 변명의 말[遁辭]은 그가 어떤 궁지에 몰려 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맹자는 이 네 가지 말은 마음속에서 표출된 것이므로 반드시 정사(政事)에 해를 끼친다고 경계했습니다.

가시 돋친 말이나 독설·폭언 따위가 국민을 위로하고 도움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엎질러진 물을 그릇에 되담을 수 없듯이 한 번 내뱉은 말은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을뿐더러 자신의 얼굴에 새겨 넣은 먹물처럼 인격의 문신으로 남습니다. 살의가 감도는 촌철보다 활인(活人)하는 촌설(寸舌)이 훨씬 유용하고 사람의 마음을 파고듭니다. 영국의 재상을 두 번이나 지내고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처칠의 유머가 한 예가 되겠지요.

대기업 국유화 문제로 치열한 설전을 벌이던 의회가 잠시 정회한 사이 처칠은 화장실에 들렀습니다. 만원 화장실에는 빈자리가 딱 하나 있었습니다. 국유화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노동당의 애틀리 당수의 바로 옆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처칠은 다른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이를 본 애틀리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제 옆에 빈 자리가 있는데 왜 거길 안 쓰십니까. 혹시 저한테 무슨 불쾌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처칠은 태연히 둘러댔습니다. “천만에요, 괜히 겁이 나서 그랬습니다. 당신은 뭐든지 큰 것만 보면 국유화하자고 주장하는데, 혹시 제 것을 보고 국유화하자고 달려들면 큰 일이 날 것 같아서···.”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는 언중유골의 해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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