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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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눈으로

방석순

2012년 11월 14일 (수) 01:00:38

가을이 깊어 갑니다. 오랜만에 찾은 한강 둔치의 공원에는 억새와 갈대꽃이 만발입니다. 풀숲 사이로 길게 뻗은 자전거 길을 한 무리의 남녀가 시원스럽게 내달립니다. 화사한 색상들이 어우러져 강변에 또 하나의 그림이 그려집니다. “멋지다!”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그들을 따라 멀리멀리 달려가 보고 싶어집니다. 한여름 세일보드가 미끄러지던 강 복판에는 이른 철새들이 물이랑을 만들며 헤엄쳐 갑니다.

길지 않은 세월 한강의 모습은 참으로 많이 달라졌습니다. 어린 시절 형님 따라 얼어붙은 강을 건너 봉은사 뒷산으로 새 잡이 갔던 기억이 이젠 꿈만 같습니다. 지금은 자동차 쌩쌩 달리는 강변 차로가 된 강둑을 넘어 수많은 사람들이 얼어붙은 강바닥을 신작로처럼 줄지어 건너다녔지요. 소달구지가 지나가면서 엄청난 두께의 얼음이 갈라져 기우뚱거리는 바람에 오금이 저렸던 생각도 납니다.

한강이 변해온 모습은 서울이 변해온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강과 지류 하천에 줄지어 섰던 판자촌이 그새 고층빌딩 숲으로 바뀌었습니다. 판잣집들이 헐리고 복개공사로 복층 차도가 되었던 청계천이 지금은 서울 도심의 산책로가 되었습니다. 양재천, 중랑천은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노닐고 물새들이 날아드는 생태하천이 되었습니다. 산이 병풍처럼 감싸 안은 서울, 거기에 강이 되살아나면서 정말 멋진 도시가 되었습니다.

친구들과 북한산에 올랐다가 운동화 하나 달랑 신고 백운대 턱 아래 위문의 험한 길을 넘는 아가씨를 만났습니다. 단신으로 홍콩에서 날아온 이 처녀는 서울의 가을 정취에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일행 중 영어, 중국어를 하는 잘난 친구들 덕에 산행 뒤풀이에도 합석했습니다. 은행 근무하다 휴가 얻어 왔다는 처녀는 산자락 두부찌개 집 비좁은 틈에 끼어 앉아 서울에서 보는 것 먹는 것 모두가 신기하고 즐겁다는 듯 눈을 반짝였습니다.

바다 건너 관광 온 많은 사람들이 서울의 번화한 모습,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에 감탄합니다. 모처럼 고국을 찾은 해외 교민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기이하게도 그 속에 몸담고 사는 우리 자신만은 대체로 불평에 절어 사는 편입니다. 그러다가 외부인들의 찬양을 들으면 뒤늦게 우쭐해지기도, 겸연쩍어지기도 합니다.

한강의 변화가 곧 서울의 변화이듯, 서울의 달라진 모습이 바로 우리 사회가 달라진 모습일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동안 우리 형제자매들이 한눈팔지 않고 피땀 흘려 이룬 결실입니다. 누이들은 머리 잘라 가발 만들고 속눈썹 만들어 외화를 벌어들였습니다. 손가락을 바늘에 찔려가며 재봉틀을 돌리고, 만원 버스 문짝에 매달려 ‘오라이’를 외치며 오라비들을 공부시켰습니다. 형제들은 중동의 열사에, 오대양 망망대해에, 용광로의 열기에 자신의 청춘을 묻고 고단한 하루하루를 견디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의 대한민국인 것입니다. 그러니 보람과 자부심을 가져도 좋지 않겠습니까.

대한민국의 오늘이 우리의 어제와 불가분의 관계이듯 대통령중심제의 나라에서 역대 대통령 또한 공과가 어떠하든 대한민국의 오늘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미 까맣게 잊힌 인물부터 차례로 떠올려 봅니다. 이승만(1948~1960), 윤보선(1960~1962), 박정희(1963~1979), 최규하(1979~1980), 전두환(1980~1988), 노태우(1988~1993), 김영삼(1993~1998), 김대중(1998~2003), 노무현(2003~2008), 이명박(2008~2013). 그리고 그들의 집권기에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해 봅니다. 정부수립, 6·25, 4·19와 5·16, 경제개발 계획과 수행, 10·26과 5·18, 서울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북방외교와 공산권 수교, 금융실명제, OECD 가입, 외환위기, 서해안의 무력충돌, 남북 정상회담과 경제협력,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 G20 정상회의, 수출 5천억 달러 및 무역 규모 1조 달러 돌파…

안타깝게도 우리는 대체로 남의 공보다는 과를 더 들추는 편입니다. 분명한 공적에 대해서도 “누가 했어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합니다. 현실로는 일어날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누가 했어도…”하는 가정은 한갓 푸념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느 때 어느 대통령이건 한마디로 간단히 낙인을 찍어 버립니다. 제 손으로 뽑은 대통령까지 흔히들 옆집 강아지 이름 부르듯 합니다. 결국 누워서 침 뱉기인데도.

한 달 후 우리는 제18대 대통령을 뽑습니다. 유력 후보 몇 사람의 경쟁이 특히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후보 간 합종연횡 움직임으로 누가 대선 레이스를 완주할지 아직 짐작키 어렵습니다. 그래도 후보들의 기 싸움은 대단하고 상대 허물 들춰내기도 어지간합니다. 들러리선 사람들의 망발은 더욱 민망합니다.

선거는 어차피 후보들의 차별성이 강조되는 분리작업입니다. 누가 더 좋은지, 덜 나쁜지, 비교하고 가리는 과정입니다. 각 진영은 으레 내 편이 얼마나 더 좋은지, 설명이 궁하면 남의 편이 얼마나 더 나쁜지, 떠벌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한 달 후엔 지금의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됩니다. 그때 그렇게 악의적인 막말로 흠집 냈던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참으로 머쓱한 일일 것입니다.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국민의 체면은 또 어찌 되겠습니까. 온갖 흉과 허물로 얼룩진 대통령을 갖게 된다면 너무 서글픈 일 아닙니까.

국민이 선택한 새 정부는 선거 과정에서 나뉘고 쪼개어진 민의를 수습하고 통합하는 일로 국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 통합작업에서 선거 과정의 분열과 망발들이 걸림돌이 된다면 모두에게 불행한 일입니다. 또한 흑색선전에 의해 국민의 선택 자체가 잘못된다면 그보다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번 대선 후보들을 예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보려고 합니다. 그들에 대한 악의적인 비판과 평가를 젖혀두고 따뜻한 눈으로 우선 그들이 가진 좋은 점만을 챙겨 보려 합니다. 출생과 성장 환경이 다르고, 살아온 궤적이 다르고, 맡은 역할이나 이루어낸 업적이 다른 이들을 함께 비교해보는 것만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또 세상일에 대해 나와는 얼마나 같은, 또는 다른 생각을 가졌는지 살피는 것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내외적으로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긴장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밖으로는 경계 지역 도서의 영유권 분쟁을 계기로 빚어진 동아시아 국가 간 갈등, 경제난을 무력시위로 돌파하려는 북한의 무모한 도발 위험, 유럽 발 금융위기와 장기적인 국제경기 침체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시대착오적인 좌우 대립과 지역 간·세대 간 갈등, 심화되는 빈부격차, 경제민주화와 복지 논쟁을 안고 있습니다. 이 같은 시대 상황이 우리가 뽑은 새 지도자가 풀어가야 할 과제들을 가늠케 해 줍니다.

남은 건 우리의 선택입니다. 저는 이번 대선에서 후보 개개인의 인품, 특히 정직성, 국가관과 리더십, 국내외 정세와 시대 상황에 대한 인식, 국민을 향하는 시선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고 싶습니다. 앞으로 한 달, 어느 후보가 이 시대의 요구에 가장 적절히 응할 수 있을지, 선택의 기준에 가장 가까운지, 심각하게 저울질해 볼 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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