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늦가을 아침의 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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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늦가을 아침의 斷想

정달호

2012년 11월 16일 (금) 00:34:25

이런 날씨를 을씨년스럽다고 해야 할지, 육지와는 어찌 그리 다를까요?
서울은 날이 화창해서 좋아 죽겠다는 사람도 있던데 말입니다. 뿐 아니라 전남 화순에 사는 친구도 날씨가 좋은지 벌교 꼬막축제에 간다고 서둘러 전화를 끝맺기도 했습니다. 날씨란 하루에도 여러 번 변덕이 있기도 한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한 두 주는 아주 좋은 날씨의 연속이었습니다. 수평선이 끝이 없는 듯 했고 늦가을이 봄날인 듯 매양 따사롭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날씨가 밤부터는 한라산 특유의 산바람이 일기 시작하더니 새벽에 비를 뿌리고는 아침 내내 비바람이 되어 그렇지 않아도 태풍에 잎들이 삭아버린 빈약한 나뭇가지들을 흔들었습니다.

이런 비바람에도 꿋꿋이 제 모습을 지키는 나무들은 역시 제주 토종들입니다. 먼나무, 녹나무, 팽나무들인데, 먼나무는 어떤 바람에도 끄떡없이 늘 무성한 푸른 잎을 자랑할 뿐 아니라 산딸기보다 작은 빨강 열매들이 녹색 잎사귀 사이 곳곳으로 그 존재를 내보이고 있어 늦가을의 총아임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녹색은 줄어들고 온통 빨강으로 뒤덮이는 게 또 먼나무의 묘미라 할까요.

팽나무는 느티나무 과에 속하며 이곳 말로는 ‘퐁낭’이라 하여 동네 어귀나 마을 중앙에 버티고 서서 그 밑에 사람들이 모여서 쉬기도 하고 놀기도 하는 아주 키가 크고 튼튼한 나무입니다. 작년 말 옆 농장에서 얻어다 한라산이 보이는 쪽 윗 마당 끝에 어렵사리 심어 놓은 게 적지 아니 애를 태웁니다. 올 여름이 지나면서 순들이 제법 잎사귀 모양을 갖추면서 생존을 과시하다가 가을 가뭄 동안 아차 하는 사이 잎들이 말라서 크게 뻗은 두 몸통 가지 중 한 쪽은 영 말이 아닙니다.

물을 줘 가면서 보살피고는 있지만 푸른빛의 옆 가지와는 달리 아예 갈색을 띠고 있는 양상이라니!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것이란 희망은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반쪽은 괜찮은데 나머지 반쪽이 아예 가망이 없으리란 것은 나무로서는 말이 안 될 것 같아서인데 여하튼 두고 볼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궂은 비바람도 팽나무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니 불평을 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 이른 아침녘에는 비가 겨우 흩뿌리는 정도여서 뜰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사방 큰 나무들은 대개가 상록수라서 가을 빛깔로 변해봤자 희미한 갈색조가 바깥으로만 좀 나타날 뿐이고, 그나마 작년 가을에 심은 제법 큰 청단풍과 산딸나무 한 그루씩이 단풍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어 다행입니다.

단풍나무로는 만산홍엽의 주인이라 할 홍단풍과 단풍잎 특유의 예쁜 작은 잎들이 여름 내 무성하게 푸름을 띠며 고운 자태를 자랑하는 청단풍이 있을 것입니다. 저 아래 마당 한 가운데 서 있는 청단풍이 딱 지금 위에서부터 곱게 물들어 밑으로 내려오는데 이 청단풍이 단풍드는 모습을 보는 것이 요즘 우리에게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뿐이랴! 사실 오늘 아침 나를 컴퓨터 자판 앞에 앉게 충동한 것은 팽나무나 청단풍이 아니라 앞동산에 나즈막이 군락지어 핀 구절초입니다. 늘 거기 있던 구절초이고 이제 꽃도 거의 다 졌지만 자세히 보니 아래서부터 적색의 단풍이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 구절초도 늦가을에 마지막 자태를 뽐내고 싶은 모양이구나 하면서 가벼운 놀라움이 일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크건 작건, 모든 식물이 때가 되면 단풍이 드는 것입니다.

구절초를 찾아보니 개미취, 쑥부쟁이와 비슷하기는 한데 꽃 모양과 색깔, 그리고 잎의 생김이 다 다릅니다. 줄기가 6월에는 여섯 마디로 있다가 음력 9월에 아홉 마디로 된다고 하며 9월 9일에 따는 것이 약효가 제일이라 해서 구절초로 불리게 되었다 하니 그 이름의 내력 또한 재미있습니다. 작년에 줄기와 잎을 따서 독에 넣어 여태 발효시키는 중인데 꽃은 따 말려서 베갯속으로 쓰기도 합니다.

금년은 늦게 온 태풍이 꽃과 나무들을 망쳐놓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기후가 뒤죽박죽이 된 탓에 팽나무 뒤로 개나리가 봄에 꽃 질 때의 모습처럼 나무 윗 쪽에 듬성듬성 피어 있기도 합니다. 동산에 심어 놓은 사과나무와 배나무에도 하얀 꽃들이 몇 개씩 피어 심심찮은 볼거리가 되고 있지만 때 아닌 꽃들이 어렴풋이 걱정도 됩니다. 어쨌거나 자연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볼거리를 가져다주니 누군들 이를 찬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비바람이 스산해도 하루 이틀이면 또 맑은 날씨가 될 터이니 이 또한 걱정할 일이 아닐 성싶습니다.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직업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이집트 대사를 역임했다. 현재 제주 소재 유엔국제훈련센터(UNITAR)소장으로 재직 중이며, 제주특별자치도의 외국인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외국인거주환경개선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나무를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묘미를 찾는다.

임철순 (121.XXX.XXX.16)

맨 마지막 문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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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7 19: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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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자 (159.XXX.XXX.15)

안녕하세요? 정대사님,
제주평화연구원 감사로 있던 임영자입니다.
정대사님을 회의석상에서 몇 번 뵈온 기억이 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쓰시는지 몰랐습니다. 정대사님의 아름다운 글을 자주 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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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6 10:3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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