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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세밑
신아연 2012년 12월 11일 (화) 01:55:32
‘이번 겨울은 아주 야무진가 봅니다.시작되자마자 무지막지하게 눈이 퍼붓더니, 맹렬한 추위도 누그러들 기색이 없군요. 추위를 많이 타는지라 혹한의 겨울이 달갑지 않지만, 눈 내린 경복궁과 삼청동, 한강변과 청계산 등, 시야의 산과 들이 황홀합니다. 이제 호주는 나무와 풀들이 무성한 여름으로 접어들겠군요. 서울에 내린 눈 뭉텅이를 보내드립니다. 더위를 잊으시라고…’

오늘 글은 엊그제 받은 어느 독자의 이메일로 시작합니다. ‘서울에 내린 함박눈 선물’이라는 정겨운 메일 제목이 연말 분위기를 고즈넉이 부추깁니다.

이민온 지 20년이 넘었지만 12, 1, 2월은 여름, 3, 4, 5월은 가을, 6, 7, 8월은 겨울, 9, 10, 11월은 봄이라는, 한국과는 반대인 자연 질서가 ‘여적지’ 몸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호주 생활 첫 몇 해 동안은 갓 세상 이치를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꼽아가며 무슨 특별한 지식을 습득하듯 달을 나눠 가면서 계절을 익히기도 했지만 '배냇체험'과도 같은 북반구의 월별 계절 감각을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도통 어색하고 적응이 안 돼서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우길 때처럼 남반구의 계절 변화는 틀렸고, 북반구가 맞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꽃 피는 계절은 원래 봄이고 희끄무레 탈색된 잎도 단풍이라 치면 거꾸로 가고 오는 봄, 가을은 그나마 감각적 경계가 흐릿하지만 여름과 겨울은 사뭇 다릅니다. 아무리 적응하려해도 7, 8월을 한겨울로, 12,1월을 한여름으로 머리가 아닌 가슴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직도 어렵습니다.

더구나 올해처럼 한 해의 막바지에 ‘눈이 온다’로 시작되는 메일을 받게 되면 여지없이 마음은 북반구의 12월, ‘겨울의 세모’로 내달립니다. 12월은 ‘조락과 사색, 겸손과 상실의 계절’이어야 제격이지, 과육이 익어가고 욕망이 작열되는 생기발랄한 여름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떼를 쓰면서 말입니다.

같은 이유로 이맘때면 떠오르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눈 내리는 밤 숲가에 서서>는 어디까지나 ‘북반구의 시’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숲 주인이 누구인지 나는 알지만 그의 집은 마을에 있어

여기 서서 그의 숲에 눈이 쌓이는 것을

지켜보는 나를 그는 알지 못하리라


내 작은 말은 이상히 생각하리라

일년 중 가장 어두운 밤, 가까이에 농가도 없는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왜 내가 멈춰 서 있는지를


말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듯 방울을 한번 흔든다

방울 소리 외에 들리는 소리라곤

가벼이 스치는 바람 소리와

사그락 쌓이는 눈소리뿐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지만

나에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숲과 숲의 주인, 일년 중 가장 어두운 밤, 지켜야 할 약속, 가야 할 먼 길 등, 마지막 달12월과 순환되는 계절의 종착지인 겨울의 이미지가 시어에 고스란히 담긴 채 중첩되고 있습니다.

죽음의 세계를 상징하는 숲, 그 숲의 주인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은 삶의 강 건너의 저 편에 아름답고 어둡고 깊은 안식의 세계가 있고, 내가 그 세계를 인지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세계로 들어가기 전 우리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그 약속, 아직도 가야할 길, 여생에 남은 길을 깊고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이 우리가 12월에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합니다.

절대자와의 약속, 역사와 민족을 향한 약속, 이웃과 공동체와의 약속, 가족 간의 약속, 자기 자신과의 약속 등, 우리 모두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난 1년을 부지런히 달려왔기에 말입니다.

생을 매듭짓는 날까지 산 자로서 지켜야 할 약속, 가야 할 먼 길을 차분히 더듬어 보려면 태양조차 오도방정을 떨어대는 한여름보다는 정결한 눈이 내리는 한겨울의 세밑이 훨씬 안정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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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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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us (220.XXX.XXX.128)
마침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생각납니다. 무척이나 밤하늘의 별을 그리워했습니다."창공에서 반짝이는 저 별에게 갈 수 없는 것일까?' 그는 그렇게도 애타했습니다.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곳도 가지 않느면 안되는 곳도 있습니다. 시간은 나에게 그곳이 무엇이며 또 어딘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십이월이든 내년 일월이든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답니까. 정해진 길로 나는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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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4 18:4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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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장춘 (60.XXX.XXX.96)
호주의 여름에 서울의 겨울과 약속을 다시 헤아려 보는 지혜가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어떻든 그곳도 한 해를 마무리 하기는 마찬가지 일터이니까요, 그런대로 이지만 마무리라고 생각하고 새해를 맞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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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2 07: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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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철 (60.XXX.XXX.96)
이해가 됩니다. 저같아도 혼란스럽겠군요. 생각해 보니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은 북반구 사람들이 만든 것들이네요. 남반구 사람들이 만든 달력이 있다면 세상이 달라졌을 텐데요. 마야족에게 그들의 달력이 있었을 텐데 어떤 것이었는지 모르겠군요. 남북반구가 서로 다른 달력을 사용한다면, 그것도 약간은 혼란을 주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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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2 07: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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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60.XXX.XXX.96)
첫 눈이 12월5일 수요일에 왔습니다. 시드니는 어떤 날씨인지 잘 몰라서 소식을 전하지 않았는데 나보다 먼저 눈 소식을 전한 분이 있었군요.

오늘 메일을 보니 이곳과 반대라는 생각입니다.

그동안 적응 하면서 지낸 이야기가 얼마나 공감이 가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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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2 07: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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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국 (60.XXX.XXX.96)
오늘 글 유난히 마음에 와 닿는군요. 한 동안 눈내리는 그 숲에 서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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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2 07: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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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241)
2012의 저무는 요즈음.....
100년,50년 전의 시대를 그시대의 상황론에서 생각해 봅니다.
아비의 죄로 자식을 벌하지 않는 법이 구약시대에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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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2 14:5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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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241)
절절 끓는 글을 보니 청춘의 심장을 느낌니다.공감하는 부분이 많습니다만 언변부족으로 반론은 피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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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2 21:2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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