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낭인 쏟아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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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낭인 쏟아지나

김홍묵

2012년 12월 13일 (목) 01:33:00

임진(壬辰)년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임진왜란(1592~1598) 이후 60년 만에 돌아온 용띠 해, 그것도 흑룡의 해입니다. 중국의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흑룡은 황룡이나 청룡과 달리 비늘의 색깔이 검은 상상의 동물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여룡(驪龍)이라고도 합니다. 그 희귀한 해를 보내며 임란 직후의 일본의 나라 상황을 잠시 더듬어 보았습니다.

오로지 무력제일주의로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의 죽음으로 조선 침략전쟁에서 물러난 일본은 공황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7년간의 전쟁에 동원된 영주들은 전쟁비용으로 곳간이 비고,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여 백성들의 살림이 피폐해진 것입니다. 마침 도요토미가 강제로 영지를 이동시켜 전쟁에 동원되지 않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가 새로운 강자로 등장했습니다.

‘평화’를 모토로 내세운 도쿠가와는 막부(幕府 1603~1867)체제를 신설하고 초대 장군(將軍)에 등극했습니다. 정치와 군사를 한 손에 쥔 사실상의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내홍과 전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른바 전쟁 낭인(浪人)들 때문입니다.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는 재주밖에 없는 낭인들은 싸움터를 잃자 도시로 나와 유곽을 맴돌거나 도둑질 주먹질 외에는 발붙일 곳이 없어진 것입니다.

거기에다 외환(外患)도 겹쳤습니다. 당시 신항로 개척과 신대륙 발견에 혈안이 되어 있던 유럽의 해양 강국들은 포교(布敎) 명분을 앞세워 황금의 섬나라로 알려진 일본 공략에 매진했습니다. 구교(스페인 포르투갈) 신도들은 도쿠가와의 자문역을 맡고 있던 윌리엄 애덤스 등의 신교(영국 네덜란드) 세력에 대항하여 도요토미가 쌓고 그의 유자 히데요리[秀賴]가 차지하고 있는 오사카[大坂]성에 낭인들과 함께 섞여 들어 전쟁을 부채질했습니다.

오사카성에 집결한 낭인과 구교 신자 수는 무려 10여만 명. 하지만 당초 어른과 싸우는 어린아이로 비쳤던 오사카 세력은 막부의 군사력에 참담한 패배를 당했습니다. 결국 도요토미 집안은 몰락했습니다. 오사카군의 군사(軍師)를 맡았던 사나타 유키무라[眞田幸村]는 평화란 전쟁 끝에 잠시 찾아오는 소강상태이므로 차제에 시대의 쓰레기를 모두 집결시켜 전국(戰局)을 청소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는 심정으로 몸을 던졌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그 오사카성 공방전을 앞두고 도쿠가와는 “내 자식을 부탁한다”는 도요토미의 간곡한 유언을 지키기 위해 오사카 성주인 히데요리와 만나 인물 시험을 겸한 당부의 말을 전했습니다. 히데요리의 생모는 도쿠가와의 아들이자 제2대 장군인 히데다다[秀忠]의 아내와 자매 간이며, 히데다다의 딸은 히데요리의 정실로 출가해 이중삼중의 가족관계로 얽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도쿠가와가 손주사위인 히데요리에게 준 인생교훈은 400년 전의 일이었지만 지금도 새겨들을만합니다.

“편견을 버리고 보면 인간은 모두 백지인 것 같소. 그게 사귀는 사람, 놓여진 장소, 자기 욕망의 많고 적음에 따라 여러 가지로 채색되는 거지. 가난한 상태로 버려두면 훔치게 되고,여인들 사이를 헤엄치게 하면 색에 빠지고, 불우한 데다 재주가 있으면 반란을 도모하고, 역량이 있고도 일터가 없으면 난을 일으키지요.”

도쿠가와는 칠십 평생을 돌아보고 경험한 끝에 당도한 ‘인생의 답’이라며 스무 살이 된 히데요리에게 덧붙여 말했습니다. “히데요리 님의 신변이나 가문 안에서 만약 악인이 많아 보이면 그건 히데요리 님의 잘못이오. 히데요리 님이 애당초의 백지에 좋은 색칠을 해 두지 않았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게 좋소.”

그리고 영주의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습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선인도 악인도 아닌 모양이오. 따라서 내 눈으로 선악을 결정해버리면 큰 과오를 초래하는 근원이 되오. 얕은 지혜로 일을 농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소행이지요. 인간이란 무엇이 슬프다 해도 어리석은 것만큼 슬픈 것은 없는 것이오. 그래서 영주는 항상 물이 새는 배 위에, 불타는 지붕 아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오.”

“그래서 때때로 매사냥을 나가시오. 이건 실없는 살생이 목적이 아니라 가는 곳 길목에서 영내의 백성들이 영주에게 어떤 인사를 하는가 그것을 봐두기 위한 것이오. 만난 백성들의 인사로 자기의 정치가 바른 것이었는가 아닌가를 알 수 있소. 영주는 백성들이 자랑할 수 있는 영주가 아니어서는 명군이라고 할 수 없지.” 백성의 뜻을 수렴하는 방법도 일러 주었습니다.

하지만 도쿠가와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전쟁 낭인들의 불만과 종파 간의 대립은 심화되었습니다. 막부 당국은 조폭이나 도둑으로 전락한 낭인들을 모아 재건대를 조직, 헌 옷을 수집해 에도[江戶] 신도시 건설에 몰려든 인부들에게 팔아 생활을 안정시켰습니다. 건설 현장에 넘쳐나는 남정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여성 인구를 감안하여 공창(公娼)인 유곽(遊廓)을 만들어 성범죄를 줄이고, 관허 무역선 수를 대폭 늘려 실직자들의 눈을 해외 무역 쪽으로 돌리도록 하는 노력도 기울였습니다.

또한 조선에서 끌고 간 기능공과 학자들로 하여금 도자기나 찻잔을 굽고, 사찰을 짓고, 유학(儒學)을 권장하여 수백 년에 걸친 전란을 종식시키고 평화의 기틀을 다지려고 했지만 백성 모두가 안정된 일자리를 갖고 태평을 구가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싸움질 외엔 다른 재주가 없고 마땅한 직업을 찾지 못한 전쟁 낭인들은 틈만 보이면 헐뜯거나 유언비어를 퍼뜨리는가 하면 부화뇌동하여 질서를 깨뜨리는 일에 불나비처럼 날아들었습니다.

문득 에도 막부의 초창기 혼란상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과 중첩되는 것이 아닌가 하여 되씹어 보니 세밑이 더욱 스산해집니다. 누가 이번 대선에서 여의주를 차지하는 흑룡이 될까 하는 결과가 궁금해서가 아닙니다. 선거 후 쏟아져 나올 수많은 정치 낭인들의 행보와 앞길이 염려되어서입니다. 정치판에 줄서는 폴리페서(polifessor)가 500명을 넘나들고, 정치평론가는 왜 그리 많은지, 보수나 종북 단체는 언제 그토록 늘어났는지, 아무튼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대선판이 끝나면 이긴 측은 전리품 챙겨 나눠먹기에 급급하고, 진 측은 정치적 낭인이 되어 불평불만의 대열에 앞장서는 것은 아닐까 적잖이 걱정됩니다. 잔치가 파한 뒤에 새로운 정치는 누가 하나, 미래를 여는 강의는 누가 맡나, 행복한 복지사회는 누가 만드나, 실업자는 누가 보듬나, 아기는 누가 봐주나···. 진정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국민 모두가 행복한 나라가 되도록 우리 모두 백지 위에 찬란한 색깔을 칠하고, 거기에 '용의 눈'을 그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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