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3)_(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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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3)

방석순

2012년 12월 27일 (목) 00:20:53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저녁에(김광섭)

하마마쓰 ‘황*글연구소’의 양혜 선생이 기어이 먼 길을 떠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밝은 웃음과 사랑을 안겨 주고, 삶의 소중함과 보람을 깨우쳐 주고 자신은 훌쩍 별이 되어 하늘나라로 가 버렸습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생전 그대로 명랑 쾌활한 모습으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겠지요. 떠나보낸 사람들의 깊은 아쉬움은 아랑곳 않고.

재일동포 여학생과 풋내기 하숙집 아줌마 아저씨로 만난 인연이 이렇듯 30여년 이어지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가 모국에서 우리말을 배우고 돌아간 후로는 까맣게 잊고 지냈으니까. 20여년 만에 다시 만난 건 역시 기연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양혜 선생은 태어난 일본 땅에 ‘황*글연구소’를 내고 일본인 제자들에게 우리말, 우리 문화를 가르쳐왔습니다. 또 제자들의 실습을 겸해 모국을 오가며 양국 친교의 다리를 놓고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자리를 함께한 덕에 저희 내외와는 형제나 다름없는 정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벌써 오래전부터 불치의 병을 앓고 있었지만 언제나 밝고 명랑한 얼굴, 센스 넘친 재담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가슴에서 시작된 병은 갈수록 깊어져 마침내 머리에까지 번졌습니다. 양혜 선생은 지난 2월 형제, 친지, 제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고별연을 열었습니다. 루게릭병으로 숨지기 전 사랑하는 이들을 모아 ‘살아 있는 장례식’을 치렀던 모리1) 교수처럼. 더 미루다가는 정말 보고 싶은 얼굴들을 못 보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평소 그답게 병고를 무릅쓰고 진두지휘한 송별의 자리는 풍성하고 화기에 넘쳐 마치 생일잔치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지난 4일 양혜 선생 대신 동생으로부터 짤막한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2월엔 바쁘신 중에도 누나의 부탁을 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누나는 3일 새벽 숨을 거두었습니다. 장례식도 무사히 마쳤습니다. 누나에게 지금까지 잘 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동안 그와 주고받았던 메일, 울고 웃던 순간들이 영화 장면처럼 머릿속을 떠돕니다. 투병 중에도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고 오히려 남을 위로하고 배려하던 고운 마음씨. 한글 가르치기를 천직처럼 붙들고 마지막까지 꿋꿋이 제 길을 걸어가던 용기. 많은 사람들과의 인연 가운데서도 그는 뭔가 특별한 의미를 전하려고 왔던 사람 같습니다.

암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어요.ㅋㅋ 주사도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신참 의사 선생님이 주사 놓는 데 실패해도 여유 있게 “이쪽에 다시 놓아 봐요” 라고 웃을 정도에요 ^^

제가 여기 일본 땅 위에서 만든 모든 인연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내가 여기서 매일 어떻게 사는지,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착한 사람들인지를 자랑하고 싶어요. 눈물 난다! 그런 분들 두고 가기가 ㅠㅠ

사람도 자연의 일부, 万物流転諸行無常입니다. 영원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기적 같은 우리 만남의 소중함을 간직할 뿐이에요.

저승사자가 할 것 다했으니 가자! 할 것 같애. 예감이 아니고 그냥 느껴요. 저승시자 아직은 안 보여요. 장터에서 우동 먹고 있겠지? 남은 내 사간을 마음대로 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의 이메일 주소는 언제까지 그대로 살아 있을는지. 지난해 조카딸들이 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묘원을 떠나며 휴대전화 문자로 하늘나라에 인사를 보내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서울과 하마마쓰를 오가던 메일도 이 땅과 저 하늘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수십 년을 괴롭히던 통증과는 마침내 화해를 했는지, 겨울 하늘은 너무 춥지 않은지, 안부를 물어 봅니다.

‘누구나 가야 할 길, 조금 앞서 갔을 뿐’이라고, ‘그처럼 큰 보람을 이루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떠날 수 있다면 그 또한 복된 일’이라고 서로들 위로했지만 가슴에 멍울처럼 남는 슬픔은 어쩔 수 없습니다.

양혜 선생의 굳센 의지 덕분이겠지요. ‘황*글연구소’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말 공부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선생이 떠난 빈자리를 제자 몇 분이 대신 떠맡아 요일별 수업을 계속하고 있답니다. 문화 답사 계획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황*글연구소’의 우리말 공부는 양혜 선생이 일본 땅에 남긴 소중한 유산인 셈입니다. 유지를 이어 가깝고도 먼 이웃 한․일 두 나라 사이에 선린의 가교를 놓고 있는 이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저 먼저 떠납니다. 슬퍼하지 마세요. 여러분 덕분에 행복했어요. 매우 소중한 분들 만나서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이 세상을 구가하십시오. 황양혜”
착한 일본 남편을 통해 제자들에게, 지인들에게 남긴 유언이 이명처럼 귓전을 맴돕니다.

* 모리1) - 모리 슈워츠(Morrie Schwartz) 미국 브랜다이스대학 사회심리학 교수. 루게릭병으로 숨지기 전 가족, 친지, 제자들과의 고별 인사를 위해 ‘살아 있는 장례식’을 치름. 제자 미치 앨봄이 은사의 이야기를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는 책으로 펴냄.

* 참조 칼럼:
‘황＊글연구소’의 특별한 수업 - 2012년 3월 2일자
비극의 땅 일본을 떠나며 - 2011년 3월 17일자
인연(2) - 2008년 11월 17일자

이태영 (58.XXX.XXX.58)

세밑 분망 중에 자유칼럼을 뒤늦게 읽고 감탄 또 감명ㅡ 조금 앞서갔을 뿐이란 말 얼마나 겸허한지, 그 진솔한 표현이 좋군요. 사람은 화해하며 살아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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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8 23:3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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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선 (218.XXX.XXX.114)

선생님~ 어제 문득 이 칼럼을 생각해냈어요. 그간 쌍둥이들 키우느라 정신이 없다가 이제 좀 여유가 생긴 모양이에요. 좋은 분이 하늘로 가셨네요. 왜 좋은 일 많이 하는 착한 사람은 하늘로 빨리 가는지 모르겠어요. 저도 고인이 하늘에서 행복하길 기도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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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30 13: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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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석순 (58.XXX.XXX.45)

여러분들의 위로와 격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효심 지극한 효선 씨, 착한 사람들이 떠나는 데 대한 아쉬움이 더 커서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네요.
너무 오래 연락을 못했군요. 그래도 귀여운 여고생 시절 이래 쌍둥 맘이 된 지금껏 잊지 않고 지내니 이 또한 귀한 인연. 아가와 온 가족의 건강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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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30 22: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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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용 (58.XXX.XXX.163)

독후감이 묘하군요. 비감과 신선한 미감 ^^첫 시, 별이된다는 내용도 기인 여운을 남깁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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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8 19:5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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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철 (58.XXX.XXX.163)

아침에 읽고도 눈물이 나는군요. 좋은 인연,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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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8 19:5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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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국 (58.XXX.XXX.163)

그 가슴 뭉클한 인연에 잠시 단역으로 참여했던 저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마 오늘 밤부터 바라보는 하늘에 새로이 돋은 병 하나가 그분의 것인 줄 알겠습니다. 부디 사인을 달리해서 보내 주셨으면 좋겠군요. 우리도 저 하늘로 올라가 함께 반짝이며 정답게 지낼 날이 오겠지요. 그때까진 서로 마주 보는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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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8 19:5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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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석순 (58.XXX.XXX.163)

그렇군요. 한 선생님께서 참으로 멋진 들꽃 칼렌다를 보내 주셨지요. 그런 선물은 미처 기대하지 못했다면서 기뻐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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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8 19:5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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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엽 (58.XXX.XXX.163)

이른 아침 눈물나게 아름다운 글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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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8 19:3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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