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신아연 공감
     
돌이 될 수 있다면
신아연 2012년 12월 28일 (금) 00:27:42
저를 만나는 사람들은 첫만남이라 해도 별 망설임 없이 자기 속내를 털어놓거나 마음 안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런 일을 겪다보니 ‘내게 남의 마음을 무장해제하는 재주가 있나 보다’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격증 가진 상담사도 아니고 사랑의 전화나 생명의 전화 요원도 아닌 제게 어떤 분은 일생 감춰 뒀던 비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부끄러운 과거, 불편한 욕망 같은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발설하기도 합니다. 아직도 꿈이 수줍은 ‘노년 청춘’이 조근조근 들려주는 삶의 환희가 있는가 하면, 질곡과 통한의 세월 속에 좌절된 꿈을 제 치마폭에 쏟아놓으며 “내가 초면에 왜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지 모르겠다”며 스스로 의아해 하는 분도 계십니다.

부부 사이나 아이들과의 갈등, 쪼들리는 살림, 부대끼는 사업 이야기도 저한테 할 때는 별로 자존심 상해 하지 않습니다. 크고 작은 실수담과 실패담도 털어놓고 어떤 땐 두 사람이 따로 와서 서로 흉을 보고 갈 때도 있으니 시쳇말로 제가 입을 벙긋하면 여러 사람 다칠 일도 아주 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공감’이라는 타이틀로 글을 쓰고 있으니 아마도 남다른 공감 능력을 가졌을 거라는 짐작에 그러는지 모르지만 전들 남의 속내나 ‘신상을 터는 재주’가 달리 있을 리는 없고, 그저 지금 눈 앞에 있는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습관은 있습니다. 그 점에서 상대가 저를 편안하고 친근하게 여기고 자신의 ‘속살’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는가 봅니다.

여하튼 수다든, 의논이든, 흉이든, 자랑이든, 독백이든, 분노든, 푸념이든, 하소연이든 직접 대면으로 혹은 이메일로, 전화로 듣게 되는 말, 말, 말들이 세월의 갈피를 따라 어느새 육중한 무게로 제 속을 지긋이 누르는 것을 느낍니다.

페르시아 신화에는 마법의 힘을 가졌다는 돌, ‘생게사브르(syngue sabour)’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슴 속 모든 이야기를 이 돌 앞에 가서 털어놓습니다. 그 말을 들어주고 또 들어주던 돌은 무게를 감당치 못해 마침내 깨어지게 되고 그 순간 비밀을 털어 놓은 사람은 고통과 번민에서 해방이 된다고 합니다.

자기 고백을 통한 내면의 치유 가치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전래 동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와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는 신화입니다.

인간의 자기 고백은 이렇듯 큰 의미를 갖습니다. 옹색하고 허술한 구덩이든, 대숲속이든, 차가운 돌덩이든 가슴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대상이 있을 때 고독과 고통, 나약과 외로움이 위무를 받고 나아가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가 봅니다.

그런데 결국 그 돌덩이가 팍삭 깨져서 산산조각이 나야만 비로소 완전한 해방감을 느낀다니 아마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친 것까진 좋았는데 구덩이나 숲이 엉성해서 자칫 소리가 새나갈까봐 전전긍긍하는 것과 같은 연유일 것입니다. 믿을 만하다고 여긴 대상에게 속을 모두 쏟아냈는데 어느 날 그 말이 세상에 떠돌고 있다면 더 엄청난 고통일 테니까요.

그러고 보니 사람들이 저를 아주 단단한 돌로 취급하는 모양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믿고 깊은 이야기를 하지만 그냥 그 앞에 앉아만 있을 뿐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으니 천상 돌입니다.

온갖 말과 글이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사이버 공간이건 어디건 모두들 자기 말을 하기 바빠 남의 말을 들을 여유도 없고 듣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자기 주머니만 챙기려고 혈안이 된 난전의 장사치들 같습니다. 좌판 벌인 사람만 있지 정작 팔아 주는 사람은 없으니 장사치들끼리 서로 노려보고만 있을 뿐 진종일 장판에 돈 한 푼 돌지 않는 형국입니다.

새해가 밝아옵니다. 또다른 한 해 동안 얼마나 많은 말들로 서로 상처를 내고 화를 돋구고 오해에 오해를 낳을지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질립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돌이 되어 볼 일입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돌이 되어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들어주고 또 들어주다 깨어질 각오까지 해 볼 일입니다. 판단하지 말고, 색깔 넣지 말고, 맞장구도 치지 말고 상대가 혼자 말하게 하고 그로써 치유받게 하고 스스로 깨닫게 할 일입니다.

다가오는 새해는 초장부터 묵묵하게 시작해서 한 해 내내 묵묵했으면 좋겠습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7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marius (220.XXX.XXX.128)
마음 열고 이야기를 다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습니까. 얼마나 편안하기에 그렇게 되겠습니까. 어지간한 내공갖고는 불가능하지요. 부럽기도 합니다. 믿음이 가니까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마음은 '믿음'을 먹고 살지 않겠습니까. 더욱 더 정진하여서 맑고 티없는 마음의 바다를 이루시길 빕니다.
답변달기
2012-12-30 07:37:49
0 0
신아연 (60.XXX.XXX.96)
그래서 저는 오히려 그 분들께 고마움을 느낍니다. 저를 뭘 믿고... 다만 제가 좀 힘들게 살아왔다는 것과, 그래서 좀 대하기가 만만하다는 것과, 제가 생긴 게 좀 부드럽다는 것, 한 마디로 경쟁심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을 노골노골 풀게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한 해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제 글을 읽어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용기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는 새해도 글로서 만나고 듣는 기쁨을 이어가기를 소망합니다.
답변달기
2012-12-30 20:35:00
0 0
김윤옥 (39.XXX.XXX.180)
스마트 폰 이란 물건이 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아서 제 삶이 송두리 채 흔들리나 봅니다.
손안에서 쉬지않고 불러대니 미처 컴퓨터 스위치를 켤 기회마저 빼앗깁니다.
아연님은 이 글을 쓰시기 전 부터 이미 독자를 가까이 아주 가까이 끄는 힘이 있었습니다.
아무나 그런 친근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누구나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마음 가짐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답변달기
2013-01-04 18:15:58
0 0
차덕희 (121.XXX.XXX.176)
인내천님의 글은 성향이 저와는 다르지만 ,"격정"이라는 열정의 일종을 느끼게 해주십니다.
폭풍같은 감정과 이성의 표현이 생방송 같습니다.
답변달기
2012-12-30 14:23:56
0 0
신아연 (60.XXX.XXX.96)
제가 하고 싶은 말씀을 대신해 주셨습니다. 격정이라는 표현이 정말 마음에 와닿습니다. 저 역시 인내천님의 덧글을 대할 때면 숨이 찰 정도로 격랑을 느낍니다. 터질듯한 역동성, 검푸른 에너지의 힘을 느낍니다.
답변달기
2012-12-30 20:31:12
0 0
차덕희 (121.XXX.XXX.213)
이 글 쓰기 바로 전에"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글응 묵상했지요.
신아연님은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감지하는 능력의 소유자 같습니다.골방기도도 응답을 받는 감사한 느낌이 드네요.
팔정도를 이룬 분 같기도 하고요.
객지 생활을 하면서도 보석같은성품이 손상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손을 좀 썼더니 타이핑이 엉망이네요.
답변달기
2012-12-28 18:25:08
0 0
신아연 (60.XXX.XXX.96)
제가 공연한 글을 썼나 봅니다. 이렇게 당치도 않은 평가를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저는 좌충우돌하며 사는 사람일 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늪에서 도무지 헤어나질 못하고 있는데 팔정도라니요... 다만 그런 제 자신을 바라보며 불쌍히 여기고 그래도 봐주다 보니 남들에게 뭐라고 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을 뿐입니다. 내 눈의 들보를 알고는 있다고 할까요...

올 한해 제 글을 읽어주신 차덕희님께 감사의 큰 절을 올립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답변달기
2012-12-29 06:52:24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