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임철순 담연칼럼
     
붓을 빨면서
임철순 2013년 01월 03일 (목) 00:35:21
붓글씨 쓰기를 시작한 지 석 달이 좀 넘었습니다. 작년 9월 하순에 시작했으니 연륜을 자랑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벌써 1년이 넘었습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1년 남짓 군대생활을 한 사람이 앞뒤의 연도까지 다 갖다 붙여 3년 됐다고 말하는 식. 그러나 지금 내 실력으로는 이제 겨우 사흘 됐다고 말하는 게 옳을 정도로 걷기는커녕 아직 기지도 못하는 수준입니다.

서예를 하면서 맨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운필(運筆)은 안 되는 게 당연하지만 붓을 잡는 법, 먹물에 붓을 적시는 방법을 모른다는 사실 자체도 잘 몰랐습니다. 書如其人(서여기인), 글씨는 곧 그 사람이라거나 心正筆正(심정필정), 마음이 바르면 붓이 바르다거나 能書不擇筆(능서불택필), 글씨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 등 이런 좋은 말은 어디선가 주워들어 알고 있는데, 서예의 구체적 방법과 몸가짐 마음가짐에 대해서는 아는 게 너무도 없었습니다.

1989년 미국에 갔을 때 초청회사로부터 골프 퍼터를 선물 받은 일이 있습니다. 골프를 치기 전이었던 나는 함께 선물을 받은 일행이 모두 어린애들처럼 좋아하는 데 놀랐습니다. 20년이 넘은 지금도 내가 그 퍼터를 쓰고 있으니 튼튼하고 좋은 물건인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당시 그거 하나만 있으면 골프를 치는 줄 알았습니다. 어쩌면 몰라도 그렇게 모를까 싶게 골프에 무지했는데, 서예를 하면서 내가 무지한 게 그때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스포츠든 오락이든 도박이든 거룩한 기예든 아니면 손쉽게 배울 수 있는 값싼 기능이든 무엇이든 저마다 그 나름의 오묘한 세계가 있고, 어느 것이든 능숙해지고 숙달되려면 각고의 노력과 남모르는 인내와 치열한 자기수련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됐습니다. 이 세상에 거저, 건성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서예에서 가장 먼저 갖춰야 할 도구는 붓인데, 붓에 대해서도 아는 게 한심하게도 없었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 선생님과 선배들이 나눠준 붓으로 종이에 먹물을 칠하는 수준의 연습을 하다가 집에 있는 붓 몇 개를 발견했습니다. 두 아들이 초등학생 시절 서예학원에 다닐 때 쓰던 그 붓에는 아이들 이름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의 20년 가까이 쓰지 않고 그대로 두어 고드름처럼 딱딱했습니다.

나는 붓을 쓴 뒤에는 빨아두어야 한다는 것도 잘 모르고 있었지만, 이 붓들은 도저히 그대로 쓸 수가 없어서 물로 빨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화장실에 붓 네 개를 가지고 가서 빠는 동안 세필(細筆) 하나를 부러뜨렸습니다. 물에 담가두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붓이 풀리지 않아 힘을 주어 눌렀더니 호(毫) 부분이 똑 떨어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무식한 것을 스스로 한탄하며 나머지 좀 큰 것들은 조심스레 물로 빨았습니다.

그 붓들은 꼭 피떡이 엉긴 것처럼 뭉쳐 있었습니다. 아니, 우리 1950년대의 가난하고 비루먹은 계집아이들, 얼굴엔 버짐과 부스럼이 피고 때에 절고 낡아 해진 저고리 차림 시골 누이들의 생전 감지 않은 머리카락 같기도 했습니다. 그 완강한 붓을 한 올 한 올 떼어내면서 풀고 깊이 배어 있는 먹물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대체 어디서 그리도 많이 나오는지 한도 끝도 없이 먹물이 나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20년 동안 맺혀 있다가 풀리는 먹물을 보면서 ‘아아, 이놈들이 나에게 할 말이 이렇게도 많았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입을 닫고 살아왔겠구나. 그렇구나, 아이들이 저마다 붓 한 자루로구나... 아이들의 먹이 이처럼 풀리지 않은 채 엉겨 있는 동안 낮도 밤도 없이 일과 술에 빠져 저 잘난 줄만 알고 살아온 나의 젊은 날을 돌이켰습니다.

그런저런 후회와 반성을 하면서 조용히 먹을 갈고 있노라면 벼루에 먹이 쓱쓱 갈리는 소리가 내게는 “맞어, 맞어!”하는 소리로 들립니다. ‘너는 잘못했어. 그러는 게 아니었어.’ 왼쪽 방향으로 갈다가 반대 방향으로 바꿔 갈아보아도 조금 있으면 그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이미 한 번 그은 획은 거두어들일 수 없습니다.

오래 공들여 빨고 보니 붓은 아주 하얗게는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백발이 대부분인 내 머리칼과 비슷한 정도의 색깔로 바뀌었습니다. 그걸 보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붓걸이에 내 붓과 아이들의 붓을 섞어 걸어두고, 무엇이 무엇인지 붓의 특성과 이름도 잘 모르면서 이것저것 빼어서 글씨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쓰기를 마친 다음에는 잊지 않고 잘 빨아두고 있습니다. 어서 글씨를 좀 잘 쓸 수 있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 하면서. 그리하여 이런 신년 벽두에 멋지고 의미 있는 휘호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10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bioj56 (1.XXX.XXX.211)
먹불과 붓과 친구삼은 올 한해
아주 멋지게 재미나게 지내실 것 같네요
아마도 옛 선비들이 사군자를 글과 함께 즐긴신 것을 생각하니
임주필님이 붓을 든건 너무나도 당연한 것 같답니다.
답변달기
2013-02-12 11:30:45
0 0
안상수 (121.XXX.XXX.16)
감사합니다.
답변달기
2013-01-09 11:00:53
0 0
권순직 (121.XXX.XXX.16)
임주필님 반갑습니다. 저는 동아일보 근무했던 권순직입니다.
항상 임주필의 좋은 칼럼 잘 읽고있고요. 특히 오늘은 서예에 입문하셨다는 소식에 더 반갑습니다. 저도 심심파적으로 시작한게 4년 조금 넘어 재미를 붙여가고있는 중입니다. 백설처럼 하얀 화선지위에 검은 글씨를 써나가노라면 어찌 그리 흑백의 조화가 오묘한지 전률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하시고요...
저는 인사동 조그만 서실에서 선생님 모시고 1주일에 사나흘 정도 연마하고 있습니다. 새해 건강하시고 계속 건필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권순직 배상
답변달기
2013-01-08 07:09:04
0 0
김윤옥 (39.XXX.XXX.180)
사진이 바뀌셨습니다.
그 동안 여기 들어올 때마다 뵌 사진으로 혹 길에서 마주쳐도 반가울 것 이라 생각했는데 정작 뵈었어도 그냥 지나쳤을 것 같습니다.
모습은 세월의 방향과 함께 흐르는 데 마음은 세월을 거스르신 듯 합니다.
더더욱 젊어지신, 어쩌면 젊어지는 샘물을 많이 드신 듯,유쾌한 청년, 아니 소년을 만난 듯 산뜻한 새해 기분을 느낍니다.
답변달기
2013-01-04 18:30:24
0 0
임철순 (121.XXX.XXX.16)
작년 모습, 올해 모습을 사진으로 비교해 보면 스스로 놀라는 경우가 많지요. 벌써 6년 정도 지난 사진이라 작년(이제는 재작년)에 찍은 걸로 바꾸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답변달기
2013-01-05 21:28:50
0 0
박정숙 (121.XXX.XXX.16)
새해 벽두에 붓에 대한 칼럼을 보면서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바쁘게 살아가는 분들에게 좋은 글을 붓으로 표현도 해보고 먹가는 여유로움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선생님께서 가까이 하신다니 새해엔 아마도 좀 더 여유있는 삶이 될것으로 믿습니다. 저 또한 30년 넘게 한글서예를 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제 인생의 반을 투자한게 아깝지 않습니다. 그 아름답고 주옥같은 옛 선인들의 작품이나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좋은 글들을 나만의 글씨로 표현해보는 감흥은 무엇으로 바꿀수 없는 것들입니다. 기회되시면
윤동주님의 서시도 한번 써 보세요....
다시 한번 선생님의 서예입문을 축하드립니다 산내 올림
답변달기
2013-01-03 22:36:40
0 0
남궁태식 (211.XXX.XXX.129)
친구야

자네도 이제 일선에서 한 발자욱 뒤로 물러나
붓글씨를 배우고 있다니 여유를 갖게 된것을 축하하네...
나도 자네처럼 지난 10월에 훌륭한 후배를 CEO로 영입하고
일선에서 빠져나와 불교공부와 붓글씨 공부를 시작했다네..

중학교때 써본 붓글씨 경험이 나로하여금 붓글씨 공부를하게 하나봐...
붓글씨를 배우기 전에 붓글씨의 역사와 대가들에 관한 책 몇권을 구해
읽어보니 중국과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다시 공부하게되데...
친구의 붓글씨 공부에 박수를 보내고
또 큰 진전이 있길 바라네...

올해도 더욱 행복하고 건강하길 비네..
남궁태식으로부터
답변달기
2013-01-03 11:17:24
0 0
문병철 (211.XXX.XXX.129)
붓, 아이, 마음, 작년말부터 받아보는 자유칼럼 읽을수록 마음이 밝아지네요.
답변달기
2013-01-03 11:05:37
0 0
한승국 (211.XXX.XXX.129)
필자소개 내용이 바뀌었군요. <술>이란 글자가 안 보여서요. ㅎㅎㅎ 함께 한 잔 나눠보진 않았지만 언젠가 그런 날 오리라 기대하고 사는 사람에겐 보물찾기가 돼버린 거 아닌지요? <붓>과 <술>은 서로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붓의 세계에 들어서신 것을 축하드리며 새로운 경지에서 느끼는 많은 얘기들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그럼 2014년 원단에는 친필 휘호를 이 칼럼에서 대할 수 있길 바라고 빌고 기대하겠습니다.
답변달기
2013-01-03 11:05:01
0 0
구성회 (211.XXX.XXX.129)
선배님! 붓이 너무 하얗게 있으면 멋이 없는 것 같습니다. 빠지지 않은 약간의 먹물이 베어 있는 붓이 저는 웬지 정이 가네요. 퇴임 하셨단 글을 보았습니다. 앞으로는 편한 마음으로 좋은 글 더 많이 써 주시리라 기대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십시오.
답변달기
2013-01-03 11:04:37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