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에나 예산

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홈 > 연재칼럼 | 김수종 2분산책

하이에나 예산

김수종

2013년 01월 11일 (금) 01:01:29

계사(癸巳)년 원단부터 우리 정치권에 야만과 몰염치가 판치는 것을 보며 기분이 우울합니다. 지난 섣달 그믐날 밤과 1월 1일 새벽 어간에 서울의 두 호텔에서 국회 예결위원회 계수조정소위 의원들이 2013년 예산을 처리하면서 보인 행태는 아프리카 사바나의 어둠 속에서 먹이 잔치를 벌이는 하이에나 떼의 행동을 연상하게 했습니다.

먹잇감은 4조 원의 증액 예산이었습니다. 예결위원회는 4조 원을 증액하면서 그 동안 제대로 된 심사를 하지도 않았다는 게 언론의 보도입니다. 그리고는 처리 법정기한이 지나 막판에 이르자 지역구 예산 챙기기에 날밤을 새우며 호텔 밀실에서 아무 기록도 안 남긴 채 4조원을 주물러댔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역구 의원들이 계수조정소위 의원들에게 전달된 쪽지가 수천 장에 이르렀다니, 그날 밤 계수조정 소위 의원들은 아마 인사불성, 즉 돈이 돈처럼 보이지 않았을 법합니다.

이렇게 해서 5천억 원 정도가 지역구 쪽지 민원으로 배분됐다고 합니다. 그 중에 칼자루를 쥔 계수조정 소위 소속 의원 7명이 자기네 지역구로 배분한 예산이 무려 517억 원에 이릅니다. 그 때문에 국방예산과 기초생활수급자, 국가유공자, 탈북자 등 우리 사회 하층민을 지원하기 위한 돈이 뭉텅 잘려 나갔습니다. 게다가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며 여야가 한입으로 폐지를 주장했던 의원연금 128억도 슬쩍 끼워놓고 통과시켰습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단 하루 달았더라도 65세가 되면 매월 120만원씩 연금을 받아 국민적 지탄을 받고 있는 제도입니다.

그날 새벽 예산배분 작업을 서둘러 마친 계수조정소위 의원들은 서둘러 비행기를 타고 따뜻한 중남미와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아마 의원들은 옛날도 그렇게 해왔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떠났을 것입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들먹이다가 잠잠해지겠지 하고 안심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 지역구 챙기려고 예산 따오는 일은 서울에서 언론의 뭇매 대상이 될지는 몰라도 지역구에서는 능력 있는 대변자로 대접받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본 대부분 국민은 기가 막힙니다. 지금 서민들이 얼마나 불안하게 하루하루를 사는데, 국회의원들이 구태의연하게 예산을 졸속으로 얼렁뚱땅 처리하고 목적에도 안 맞는 해외여행에 돈을 흥청망청 쓸 수 있느냐는 겁니다.

깡통 아파트가 쏟아지고 전세 가격이 마구 뛰니 집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50대의 베이비 붐 세대가 생활비는 펑펑 들어가는데 노후 보장도 별로 없이 줄줄이 실업자의 대열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대학을 나온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일자리가 없어 졸업도 못하고 휴학 중인 100만 명의 대학생은 실업률 통계에 잡혀있지도 않습니다. 이대로 가면 중산층의 중흥은 고사하고 몰락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한국의 올해 예산은 342조 원, 이것은 오는 2월 25일 출범하는 박근혜 정부의 첫해 예산이기도 합니다. 미국 돈으로 환산하면 3,214억 달러입니다. 석유가 펑펑 쏟아지는 남미 최대의 산유국 베네수엘라의 작년 국민 총생산(GDP)보다 많습니다. 전 세계 190여 개국 가운데 GDP규모가 우리나라 예산보다 큰 나라는 32개국에 불과합니다. 대단한 예산 규모입니다.

그러나 이 돈은 국민이 내놓은 혈세입니다. 이 천문학적인 예산규모를 만들기 위해 국민 중에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직접세를 안 내는 사람은 많지만 먹고 자고 잠자는 모든 것이 모두 부가가치세의 과세 대상이니 5천만 국민 모두가 나라에 내놓은 돈이 바로 세입예산입니다. 평균해서 1인당 국가에 바치는 세금이 680만원입니다. 예산은 한 푼도 허투루 쓸 수 없는 돈이라는 인식이 공직자, 특히 국회의원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아야 나라가 제대로 설 수 있습니다.

지난 2년간 우리 사회에 소용돌이쳤던 국민의 열망은 신뢰와 진정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정치와 사회의 변화였습니다. 정치쇄신이니 기득권 포기니 하는 말이 신랄하게 거론되었던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지 아직 한 달도 안 됐는데 먼 옛날 일 같습니다. '호텔 쪽지예산’으로 상징되는 예산안 처리의 행태를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더라도 정치쇄신이나 기득권 포기는 잠꼬대 같은 희망일 뿐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