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서 온 연하장의 사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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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서 온 연하장의 사연들

황경춘

2013년 01월 14일 (월) 01:05:47

‘우리 이제 네 사람만 남았어!’ 이 비명(悲鳴)에 가까운 한탄의 소리가 바다 건너온 연하장에서 들렸습니다. 또 다른 카드에도 비슷한 하소연이 적혀 있었습니다. 지난해 인도네시아의 발리 섬에 갔었는데 10여 년 전 같은 모임에서 만난 얼굴들이 거의 없었다고 아쉬워했습니다.

이메일, 페이스북, 카톡, 국제 영상전화 등 통신수단이 날로 발달하지만, 아직도 우편으로 보내는 성탄 카드나 연하장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컴퓨터 화면을 통해 보는 소식보다 더욱 마음에 와 닿는 친근감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직장에 있을 때에는 주로 국내의 친지나 신세진 사람들에게 연하장을 보냈으나, 은퇴생활로 들어간 뒤부터는 주로 해외에 있는 분들과의 카드 교환을 즐기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시판되는 비싸고 화려한 카드를 피하고 우체국에서 만드는 비교적 저렴하고 해외로 발송하기 편리한 연하우편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100매를 사도 모자라던 것이 점점 수가 줄어 지난 세밑에는 국내 15매 국외 45매로 줄었습니다.

연말의 혼잡을 피해 카드 발송을 하기 위해 11월 14일에 있었던 고등학교 동기생 모임을 시내에서 마치고 근처 우체국을 찾았더니 다음날인 15일에 판매를 시작한다고 해, 헛수고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선 점심 모임이 별 없었고 곧 때아닌 한파 내습으로 차일피일하다가 결국 한 달이 지난 12월 14일의 모임 후에 우체국에 들렀습니다. 그랬더니 예상한 대로 마음에 드는 카드는 이미 다 팔린 뒤였습니다. 다른 우체국에 가보라는 직원의 권유가 있었지만 남아 있는 것만으로 수를 채웠습니다.

해마다 수가 줄게 된 것은 세상을 떠나거나 그밖의 이유로 카드 교환이 중단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벌써 많은 친구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가 하면 저보다 연상인데도 건강하고 매년 잊지 않고 연하장을 보내온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에 재작년에 96세를 맞이한 일본인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에 알게 된 친구로 제 집에서 1주일 묵고 간 뒤, 우리 부부도 얼마 뒤에 교토(京都) 부근에 사는 그를 찾아가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10여 년 전, 스키하는 사진을 보내와 86세지만 정정하다고 자랑하던 친구였습니다.

언제나 12월 초에 도착하는 그분의 카드가 지금껏 오지 않아 무척 걱정하고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집안에 초상이 나면 연말이 되기 전에 ‘상중이어서 금년에는 연하장을 보내지 않습니다’라는 전갈을 해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연하장이 아직 복중에 있는 집에 배달되지 않기를 바라는 배려입니다.

그런 기별도 없이 해마다 오던 연하장이 금년에는 아직 오지 않으니 그 노인의 안부가 더욱 걱정됩니다. 그런 가운데 반가운 소식도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남자 동기생으로 저를 빼고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친구가 도툐에 살고 있습니다. 선거 등 모국에서 큰일이 있을 때마다 빼놓지 않고 전화를 걸어오는 그 친구가 이번 대선 때에는 소식이 없어 무척 걱정하고 있던 참에 연하장을 보내와 무사히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이클 브라운(Michael Brown)이라는 친구는 한국동란 때 피난수도 부산에서 같은 직장에 있었습니다. 기후 좋은 하와이에서 은퇴생활을 하며, 한국과 관련이 있는 절친한 친구 세 사람과 정기적으로 골프나 회식 등으로 여생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AP에서 일하던 그의 친구 세 사람이 3년 전부터 차례로 유명을 달리하고, 마지막 친구가 떠난 것은 작년 가을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건 네 사람뿐이라고 슬픈 외마디를 보낸 사람이 바로 이 친구입니다.

10년 전 LA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 그때까지는 건강한 이 네 사람과 만나 며칠간 흐뭇한 회상(回想)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중 두 사람은 그 뒤에도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해 다시 만나기도 했습니다. 이제 혼자 남게 된 브라운 씨의 허탈한 심정은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2013년에 이쪽으로 다시 올 기회는 없겠는가?” 라고 시작한 그의 짤막한 사연은 “우리는 이제 한국시절의 생존자로서 네 사람만 남게 되었네.” (We are now down to four survivors from our time in Korea.)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와이에 있는 자기와, 서울에 있는 저, 미국 본토에 있는 두 사람을 거명했습니다. 우리 네 사람은 당시 미국대사관 신문과에서 같이 일했습니다.

한편으로 밝고 반가운 소식도 물론 날아옵니다. 동북일본의 산골 마을 야마가타(山形)에 있는 친구는 “김치의 맛이 최고인 계절이 되었습니다.”라고 기뻐했으며, 타임(TIME) 도쿄총국 직원이었던 아줌마는 “한류 드라마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라 했고, 다른 친구 하나는 “40 년 만에 서울을 방문했더니 옛 추억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라고 전해왔습니다.

국내에서는 자주 만나는 사람끼리 화려한 크리스마스 카드나 연하장을 교환하는 것을 허례허식이라고 자제하는 풍조가 있었지만, 한 해에 한두 번밖에 소식을 듣지 못하는 해외 친구들과 새해 인사를 주고받는 연하장 습관은 계속하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통계숫자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만, 이웃 나라에서는 지난 연말에 경품 추첨 번호가 달린 연하우편엽서를 예년처럼 30억 매 이상 발행했으며, 이 가운데 정월 초하루에 특별 배달한 수는 18억 9천9백만 매로 국민 한 사람에 평균 15장의 연하장이 배달된 셈이라 보도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12월 15~25일에 우체국에 접수된 연하장은 정월 초하루에 정규 집배인과 아르바이트 학생이 동원되어 전국 일제히 특별 배달을 하고, 1월 하순에 전국으로 중계 방송되는 경품 추첨이 정초 풍물로 자리잡은 지 오래입니다. 계속되는 불경기 속에서 말입니다. 사회 체면과 전통을 존중하는 민족답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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